“금을 사랑한 총재, 5조5000억원 투자. 상투 잡아 3년간 1조2000억원 증발!” 2013년 11월 18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 때 김현미 당시 민주당 의원이 김중수 한은 총재에게 보낸 서면 질의의 제목이다. 김 전 의원은 이 질의를 보도자료로도 만들어 배포했다. “한국은행은 금의 평가 손실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여전히 앵무새처럼 ‘우려할 사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금 가격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매입에 나서 결과적으로 평가 손실을 가져온 점에서 한은이 앞장서서 국가적 손실을 가져왔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2010년까지만 해도 한은이 외환보유액을 통해 쌓아둔 금은 외환위기 때인 1990년대 말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생긴 14.4t(톤)에 그쳤다. 하지만 김 총재가 취임한 후 한은은 금 보유량을 2011년 54.4t, 2012년 84.4t, 2013년 104.4t으로 늘렸다. 그런데 이후 금값이 하락하면서 평가 손실이 발생하자 김 총재를 향한 정치인들의 비난이 쏠렸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뿐 아니라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의 ‘경제통’으로 꼽히는 나성린·이한구 의원 등도 ‘금 투자 실패’를 지적했다. 김중수 총재는 이에 “금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자산으로, 한국 외환보유액 중 금 보유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해명하며 진땀을 뺐다.
지난해 이후 금값 급등으로 한은 외환보유액의 금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12년 전 정치인들이 ‘왜 샀나’라고 질책했다면, 지금은 ‘왜 안 샀나’로 비난의 방향이 뒤집어졌다. 지난해 국감 때는 박대출 국민의힘 의원이 방송인 김구라의 금 투자 성공 사례까지 들어 한은의 소극적인 금 매수에 대해 질책했다.
한은의 과거를 아는 인사들은 2013년 금값이 하락했을 때 국감 등에서 제기된 ‘금 투자 실패’에 대한 질책이 트라우마로 남아 이후 한은의 금 매입이 매우 소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외자운용원의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당시 김중수 총재가 금 매입의 취지를 설명했지만 정치인들은 막무가내였다. 이후 한은의 금 매수가 멈췄는데 지금은 시세가 너무 올라 사기 어렵게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아쉬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은은 외환보유액 현황을 공개하면서 금값을 시장에서 매매되는 ‘시가(時價)’가 아닌, 매입 당시의 시세를 반영한 ‘장부가’로만 기재해 공개한다. 금값은 장기적으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비슷하게 안정적으로 움직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변동성이 미국 주식만큼 큰 데다 수시로 사고파는 자산이 아니기 때문에 시가 공개의 실익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4일 한은이 발표한 ‘2025년 1월 외환보유액’ 자료에도 금 평가액은 47억9000만달러로, 2013년 이후 고정된 수치로 표기돼 있다. 그렇다면 한은이 보유한 금을 시가로 평가하면 지난 12년간 미실현 손익은 얼마나 증감했을까.
2013년 국감 당시 김현미 의원 자료에 따르면 한은이 금 매입에 쓴 돈은 총 51억7789만달러로, 2013년 금 시세로 보면 약 11억3000만달러 평가 손실이 난 상태였다. 세계금위원회의 연도별 평균 금 시세에 따르면 당시 트로이온스당 1411달러였던 글로벌 금값은 이후 추가 하락했고 2019년까지 1400달러 선 아래 머물며 소폭 등락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즈음 금값이 급등하기 시작해 지난해까지 6년 연속 크게 올랐다. 지난해 평균 금값은 3431달러, 올해 들어선 최근 하락 폭을 감안해도 4926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김중수 전 총재는 국감에서 금을 산 취지에 대해 “위험할 때 대처하기 위한 것, 그러니까 온스당 1900달러가 됐을 때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그의 ‘위기 시나리오’보다도 금값이 160% 상승한 셈이다.
한은이 보유한 금 104.4t 기준으로 보면 2013년 40억4000만달러로 추산됐던 평가액은 2015년 38억9000만달러로 가장 적은 수준을 기록했다가 2020년 59억4000만달러로 ‘본전’을 넘어선 후 지난해엔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돌파해 115억1800만달러까지 불어났다. 4일 기준 평가액은 165억3000만달러로, 보도자료에 기재된 가치의 3.5배 수준에 달한다.
외환보유액의 금 평가액이 늘어나 ‘금고’에 보탬이 된 지금 상황은 고무적이지만, 2013년 ‘국감 트라우마’ 이후 한은이 금 투자를 전혀 늘리지 않은 점에 대해선 아쉽다는 지적이 많다. 김중수 전 총재의 설명대로 한국의 금 보유액은 세계 주요국 중 최저 수준이다. 세계금위원회에 따르면 한국 외환보유액 중 금의 비율은 3%로 위원회가 집계한 100국 중 98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