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환전소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환전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박성원 기자

은행원 김모(40)씨는 지난달 말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가려다 일본 후쿠오카로 행선지를 바꿨다. 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 같은 여행지를 알아보며 예산을 짜다 보니 이 국가들의 통화 가치가 상당히 올라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김씨는 “동남아 여행은 무엇보다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이젠 아닌 것 같다. 비교적 엔화 환율이 나아 보였다”고 했다.

정부가 연일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지난달 원화 가치가 주요국 중에서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0월에 이어 11월에도 1400원 선 위에 머무르며 고환율이 고착화될 조짐을 보인다.

그래픽=이진영

◇11월 원화 가치 하락, 주요국 ‘1위’

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3.2% 하락(환율은 상승)해 한은이 관련 통계를 집계하는 42국 중 하락 폭이 가장 컸다. 주요 6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11월 초 99.8에서 지난달 말 99.4로 오히려 약간 내려갔는데, 같은 기간 원화 환율은 거꾸로 1424.4원에서 1470.6원으로 46.2원 올랐다. 7월 이후 원화 가치는 8.9% 내려가 통화 가치가 극도로 불안정한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하락 폭이 컸다.

원화 가치는 그동안 저렴해서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았던 동남아 국가들보다도 많이 하락했다. 베트남 통화인 동의 달러 대비 가치는 지난달 0.2% 내려가는 데 그쳤고, 태국 바트, 말레이시아 링깃, 싱가포르 달러 등은 오히려 가치가 올라갔다. 통화의 상대적 가치가 상승하면 한국 관광객 입장에선 원화 기준으로 더 많은 비용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1박에 170만동 정도인 베트남 다낭의 5성급 호텔에 묵을 경우, 100동당 환율이 5.18원이었던 7월 초까지만 해도 1박 숙박비가 한화로 8만8000원 정도였다. 이제는 환율이 100동당 5.56원으로 올라 9만4500원을 내야 한다. 한국관광공사의 여행객 통계에 따르면, 올해 베트남·태국·필리핀으로 가는 관광객은 각각 4%, 18%, 20% 감소했다. 세 나라 모두 지난해엔 한국 관광객이 크게 증가했었다.

◇고환율 장기화로 커지는 우려

원화 환율이 크게 올라가 진정되지 않는 원인에 대해선 개인·연기금 등의 해외 투자가 급증하고, 대미(對美) 투자 부담에 기업들도 달러를 쌓아두고 있는 등 여러 원인이 겹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외채 상환 부담이나 국가 신용도 하락 같은 ‘기초 체력’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해외 투자 자제’ 설득 외에 정부가 개입할 도구가 마땅치 않다는 것도 문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에서 “외채 문제로 환율이 올라간다면 외환보유고 같은 수단을 쓸 수 있지만, 해외 투자로 달러가 나갈 때 개입을 통해 막아야 할지는 참으로 애매하다”고 했다. 실제로 고환율에도 한국 국채의 부도 위험도를 나타내는 CDS(신용부도스와프) 프리미엄은 0.23%포인트로 안정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고환율이 지속될 경우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소비자물가가 따라 오르고 해외 여행객과 유학생의 비용이 늘어나는 등 소비자 부담은 커진다. 원자재 가격 상승에 기업 부담도 커진다.

또 환율·물가 우려로 한은이 금리를 내리기가 힘들어지면서 가계의 대출 상환 부담은 계속되고 소비와 성장률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있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대 교수는 “과거엔 환율이 오르면 경상수지가 개선되는 장점이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미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무역 부문의 장점은 거의 상쇄되고 대신 수입 물가 상승과 같은 고환율의 단점은 사라지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물가는 이미 오를 조짐이다. 휘발유 가격은 최근 국제 유가가 하락했음에도 환율 상승과 정부의 유류세 인하 폭 축소가 겹치면서 5주째 상승해 리터(L)당 평균 가격이 1746.5원으로 2년 만에 최고치로 올랐다. 식품 업체는 최근 원재료 수입 물가 상승을 이유로 과자·빵 가격을 잇따라 올렸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대형 마트에서 판매되는 미국산·호주산 소고기 수입 단가가 전년 대비 약 10% 올랐고, 수입 과일 가격도 오름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