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집무실에서 지난 5일 만난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은 “조선업 주도권이 조만간 중국으로 넘어간다고 모두가 말해 왔지만 미·중 분쟁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산은의 관리 체제를 벗어나는 대우조선해양이 경쟁력을 갖추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투자에 한계가 있는 공공기관 관리 상태로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다른 기업도 정상화하는 대로 신속하게 매각할 것”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조선업은 모두가 중국에 주도권을 조만간 빼앗길 것이라고 여겼던 산업이지만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다시 한국에 기회가 왔습니다. 대우조선해양이 이 기회를 회생의 발판으로 삼으려면 빠른 매각으로 국책은행의 관리를 벗어나는 것밖에 답이 없습니다.”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집무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산업은행 같은) 공공기관이 대주주로 있는 한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고 성장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산은이 관리 중인 다른 기업도 정상화되는 즉시 민간으로 되돌리겠다”고 했다.

산은은 한화가 2조원에 대우조선을 인수·합병(M&A)하기로 했다고 지난달 말 발표했다. 강 회장은 21년 동안 산은이 대주주로 관리해온, ‘묵은 체증’ 같은 대우조선 매각이란 큰 숙제를 해결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여의도에 있는 산은 본점은 현재 로비·복도·엘리베이터 등 거의 모든 공간이 ‘부산 이전 반대’ 구호로 도배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그는 “대우조선 매각이 성사됐을 때 기쁨도 컸지만 부산 이전 문제로 힘들어하는 직원들을 보며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다. 취임 후 120일 정도 지났는데 1200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산은 부산 이전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中이 조선업 대세? 미중 분쟁으로 상황 바뀌었다”

-대우조선 매각 가격에 대해 ‘헐값 매각’ 논란이 일고 있다. 가격이 적당하다고 보나. (한화는 14년 전에도 대우조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인수를 포기했다. 당시 인수 가격은 6조3000억원이었다.)

“논란 자체가 자원 낭비라고 생각한다. 2008년 가격의 3분의 1이라는 것이 논란의 요지인데 당시엔 환경이 완전히 달랐다. 대우조선의 시가총액이 10조원, 영업이익이 1조원이 넘었다. 지금은 시가총액이 2조원, 순손실이 2조원에 육박(2021년 기준)한다. 2조원이 헐값이라면 시장에서 사려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아니지 않나.”

-대우조선의 기업 가치는 왜 그렇게 떨어졌나.

강석훈 산업은행장./이태경기자

“시장 환경도 어려웠지만, 근본적으로는 대우조선이 산은 아래 있는 한 기업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산은은 공공기관이라는 특성상 대우조선이 겨우 연명할 돈만 투입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위한 과감한 연구·개발비 투자 등은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업황이 나쁘면 아래로 더 고꾸라지고, 좋아도 앞서서 가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어 왔다.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직할 때부터 대우조선 문제를 다뤘다. 매각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 나의 오랜 신념이었다.”

-조선업은 이미 중국으로 대세가 넘어갔다는 전망도 적지 않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주로 유럽 회사들이 선박을 주문하는데 미·중 분쟁 이후 미국과 유럽이 주축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중국을 ‘나토의 이익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다. 유럽 국가들이 중국 배를 사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한국 조선업이 시간을 번 셈이 되었다. 아울러 최근 (한국이 경쟁력이 있는) 친환경 선박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도 한국에 매우 유리하다. 한화에 매각 작업을 할 때도 이와 똑같이 주장해 설득했다. 합병 후 한화가 역량을 키우는 방위산업 및 신재생에너지와 조선업이 시너지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른 관리 회사도 정상화 즉시 매각”

강 회장은 지난 7월 대우조선 하청업체 노조 파업 때 “파산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미 공적자금 11조원이 투입된 대우조선이 파업으로 생산 차질을 빚어 산은이 돈을 더 넣는 상황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뜻을 확실히 했다. 이틀 뒤 파업은 종료됐다.

-정말 파산시킬 생각이었나.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산은이 도대체 대우조선에 얼마나 돈을 더 투입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연명만 시키는 것이 우리 국가와 국민을 위해 옳지 않은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이후 대우조선 매각 관련해서 정부가 ‘오케이’ 신호를 굉장히 빨리 줬는데, 정부 내에서도 대우조선 문제가 (산은 아래서) 시간을 끈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진 않겠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7월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내에서 파업 중인 하청업체 노조와 파업 철회를 촉구하는 대우조선 직원이 동시에 농성을 벌이는 모습. /김동환 기자

-KDB생명, HMM 등도 산은이 장기간 관리 중인 기업이다. 매각 계획은.

“산은 정관상 기업이 정상화하면 매각해야 한다. KDB생명은 이미 매각 주관사 선정이 끝났다. 10월 말 이사회 의결을 거쳐 매각 공고를 낼 예정이다. 해운사인 HMM은 산은 혼자 결정은 어렵고, 정부의 해운 정책과 연동이 되어야 한다. 다만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HMM 매각은 조금 실기(失期)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3월 3만5000원 정도였던 주가가 지금은 1만8000원으로 내려와 있다. 주가가 좋았을 때 지분을 매각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의 합병 절차는 잘 진행 중인가.

“반독점 심사가 미국·유럽·영국·중국·일본 등에 남아 있다. 핵심은 미국인데 올해 안엔 결정이 나리라고 예상한다. 한 가지 어려움은 최근 항공사 합병 관련 미국의 규정이 바뀌었다. 과거엔 노선 독점을 해소하기 위해 슬롯(특정 시간 항공기 출·도착 시간대)을 몇 개 줄이라는 조치가 내려졌는데 이제는 줄인 노선을 채울 다른 항공사까지 기업이 직접 찾아와야 한다. 규정이 바뀌고 나서 첫 합병이 대한항공-아시아나다. 로스앤젤레스(LA)~인천처럼 이용객이 많은 노선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몇몇 노선은 다른 항공사를 섭외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다.”

-산은이 대주주인 한국전력도 적자가 계속 불어난다. 산은엔 영향이 없나. (산은은 한전 지분 33%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비용 증가에 최근 연료비 상승이 겹치며 한전 적자가 커지고 있다.)

“전기료를 올린다 해도 한전의 올해 적자 예상 폭이 21조원이라더라. 이렇게 되면 산은 손실이 7조원이 나고, 이로 인해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이 1.3%포인트 하락하게 된다. (지난 6월 말 기준 산은의 자기자본비율은 14.85%다.) 그 결과 산은의 자금 공급 여력이 33조원 증발한다. 잘못된 정책, 정부의 잘못된 결정 하나가 국민 경제에서 33조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실감했다. 공공기관장 자리가 무겁게 느껴지게 된 계기가 됐다.”

◇“정치는 마약… 종속되고 싶지 않다”

강 회장을 만난 날 ‘부산 이전 반대’ 구호로 뒤덮인 산은 1층 강당에선 스타트업 기업 소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활기찬 행사장과 투쟁 구호의 공존이 불협화음을 내는 모습이었다. 강 회장은 “금리가 올라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민간 투자가 위축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산은이 혁신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부산 이전을 해도 스타트업 투자 등 여러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보나.

“기업의 물리적 위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직원들의 어려움이 크다는 것은 이해한다. 미혼 직원은 타지에서 결혼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맞벌이인 젊은 직원은 육아 문제가 생긴다. 청소년 자녀가 있으면 교육, 그 위 세대는 주거 등등 세대별로 고충이 다 있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부의 대의가 있더라도 개인의 생활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들어지는 상황이고, 반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나의 역할은 그런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만두는 직원도 생기는 등 부작용이 커 보인다. 직원들을 설득할 수 있나.

“국회가 최종적으로 이전 결정을 내리면 앞서 말한 육아·교육·주거 등 세대별 고충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인센티브(우대책)를 부산시와 협력해 마련하려 한다. 그런데 직원들은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 소통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 수백 명이 모였지만 구호를 외치고 나가버리고 밥자리에 내가 나타나면 마스크를 쓰고 식사도 거부한다. 내가 머리에 뿔 난 놈도 아니고…. 이번 기회에 직원 복지와 교육 기회를 늘릴 방안을 생각 중인데 이런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것이 너무 힘들다.”

-부산 이전 문제를 둔 진통은 예상할 수 있지 않았나. 산은 회장 자리를 왜 수락했나.

“국회의원, 청와대 수석 등으로 일할 때 현장에서 실무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 대우경제연구소에서 금융팀장을 하면서 ‘세계적인 금융인이 되겠다’라는 꿈을 어린 마음에 품었었다. 산은 회장이라면 그 꿈을 이룰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정치를 할 생각은 없나.

“정치는 마약이라고 하지 않나. 해보니 그런 측면도 있더라. 하지만 정치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고, 거기 빨려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것이 지금으로서 나의 선택이다.”


☞강석훈 회장은

1964년생.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우경제연구소 금융팀장,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했고 2012년 총선에 새누리당으로 출마해 서울 서초을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6년 총선에선 박성중 전 서초구청장에게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부터 1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했다. 이후 건강 문제로 휴식기를 가졌다. 올해 초 국민의힘 대통령선거 캠프에 합류했고 지난 3월부터 윤석열 대통령 정책 특보로 일하다 6월 산업은행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큰 병도 겪어보았고 탄핵 정국도 보았기에 모든 일은 지나간다고, 정신을 다스리려고 노력한다. 좋아하는 미식축구 동영상을 보며 15~20분 정도 스테퍼에서 땀 빼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 겸 건강 관리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