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결혼한 직장인 허모씨는 결혼 전부터 살던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에 신혼집을 꾸렸다. 아내가 내년 초 출산 예정이라 보다 큰 집으로 이사가려고 알아보던 중 생애 첫 주택을 사는 사람에게 유리한 정책 대출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LTV(주택담보인정비율) 80%까지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생애 최초 주택 구매자 대출’이었다. 허씨는 기대를 갖고 은행에 알아봤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출 한도가 6억원으로 정해져 있어 원하는 아파트를 사기엔 부족했다. 그는 “서울 아파트는 웬만하면 10억원이 넘는다. 한도를 무조건 6억원으로 정해놓으면 LTV 80%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을 지원하기 위해 은행들이 이달부터 판매 중인 생애 최초 주택 대출의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정부가 기대한 만큼의 혜택을 받는 사례가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대출은 지역별로 40~70%인 주택 대출의 LTV 상한을 생애 첫 주택일 경우 80%로 올리는 정책성 대출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념 간담회에서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생애 최초 주택 대출을 금융 분야 주요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첫 주택’ 자격, 대출 금리 상한, 소득 요건 등 여러 겹의 조건이 있어 실제 ‘LTV 80%’ 주택 대출을 받아가는 이들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서울에서 LTV 80% 채운 ‘생애 첫 주택’ 대출 4명뿐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이 지난 1~16일 집행한 생애 최초 주택 대출 내역을 본지가 집계한 결과 총 233명이 이 대출을 받아갔다. 그런데 이 중 한도인 LTV 80%를 꽉 채운 대출은 23%인 55건에 그쳤다. 특히 선호도가 높은 서울의 주택 구입자 중 LTV 80%를 적용받은 사람은 4개 은행을 통틀어 4명뿐이었다. 정부는 생애 최초 주택 구매자의 내 집 마련을 위해 LTV 상한을 크게 높여주기로 했다는 점을 홍보했지만, 정작 현장에선 이 제도의 혜택을 충분히 받아간 이가 기대만큼 많지 않았음을 뜻한다.
생애 최초 주택 대출은 기존엔 아예 대출이 불가능했던 15억원 이상 아파트에 대해서도 대출이 가능하고 소득 상한 제한도 없애는 등 기존 대출과 비교하면 유리한 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규제 완화 효과가 충분히 실행되기엔 다른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고 은행 대출 담당자들은 말한다. 일단 다른 대출과 마찬가지로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40%를 적용받는데, 혹시 이 조건을 통과하더라도 대출 상한은 6억원으로 막혀 있다. 최근 상승세가 다소 식었다고는 해도 서울 주택 가격은 평균 9억2000만원(KB 부동산, 지난달 기준), 아파트는 12억8000만원이다. 매매가가 평균 정도인 서울 주택에 대해 LTV 80%로 대출을 받으면 대출금이 7억3600만원 정도는 되어야 한다. 시중은행 여신 담당 임원은 “서울의 집값을 감안하면 6억원이라는 대출 상한이 ‘LTV 80%’라는 혜택을 상쇄해버리는 측면이 있다”라고 했다.
◇DSR 40%, ‘생애 최초’ 자격 등 “너무 까다로워”
LTV 80%를 채워 대출을 6억원까지 받을 수 있더라도 DSR 제한에 걸려 대출 금액이 줄어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재 1억원이 넘는 모든 대출은 DSR 40%를 적용받고, 이 규제는 생애 첫 대출에도 적용된다. 40년 만기에 연 4.5% 대출을 받을 경우 연소득이 최소 8100만원은 되어야 6억원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생애 최초’라는 조건도 매우 까다로워 아예 대상에서 탈락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집을 소유했던 이력이 있으면 현재 무주택자라도 이 대출을 받을 수 없다. 결혼 전 이미 집을 처분했거나 부모님이 사망해 의도치 않게 집을 상속받았다가 팔았던 경우도 ‘생애 첫 주택’ 구입자에서 제외된다.
금융 당국은 대출의 취지가 말 그대로 ‘생애 최초 주택’ 구입자이기 때문에 여러 사정을 다 봐주기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실수요자의 주택 구매를 돕는다는 취지를 감안하더라도 다소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IT 회사에서 일하는 30대 직장인 김모씨는 “상속받은 지방의 주택을 수년 전 헐값에 처분했었는데, ‘생애 최초’가 아니기 때문에 이 대출 대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라며 “투기를 한 것도 아닌데 너무 가혹한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