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오전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2022 BOK 국제컨퍼런스'에서 개회사 및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뉴시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일 “이번 인플레이션이 진정된 뒤 선진국을 위시해 한국, 태국, 중국 등 인구 고령화 문제에 직면한 일부 신흥국에서 저물가, 저성장 환경이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BOK(한국은행)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를 통해 “인플레이션이 진정됐을 때 장기 저성장 흐름이 다시 나타날 것인지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면서도 이런 가능성을 제기했다. ‘장기 저성장(secular stagnation)’이란 일시적인 요인에 의한 경기 후퇴를 넘어서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불황을 뜻한다. 이 총재의 하버드대 유학 시절 지도 교수였던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강조한 개념이다. 이 총재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때문에 ‘장기 저성장’이 온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이 총재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장기 저성장에 빠진다면), 폴 크루그먼 교수가 선진국 중앙은행에 조언한 것처럼 한국이나 여타 신흥국도 무책임할 정도로 확실하게 (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겠다고) 약속해야만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루그먼 교수가 강조한 완화적 통화정책이 어떤 나라에나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만병 통치약’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 총재는 이어 “(자산매입 등) 비전통적 정책수단을 활용하면 통화가치 절하 기대로 자본유출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신흥국의 중앙은행은 통화정책 운용에 있어 더욱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행동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신흥국이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밀고 나가면 자본유출 사태를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총재는 이와 관련 중앙은행들의 ‘돈 풀기’ 정책의 부작용을 짚어보며 매파적(긴축적 통화정책 선호) 성향을 드러냈다. 그는 “양극화 현상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더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지난 10여년간 중앙은행의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 활용과 이 과정에서 나타난 자산가격 상승에 대한 부정적 인식 속에 중앙은행이 결자해지의 입장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 위기 이후 경제 양극화가 확대되고, 디지털·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중앙은행의 역할 범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더 넓어졌다”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 중앙은행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처럼 물가 안정이라는 기본 역할에만 집중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이 총재는 “최근 주요 논제로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혁신이나 기후변화 대응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며, 앞으로 이를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은 커질 수밖에 없다”며 “현재 각국 중앙은행도 이러한 인식 하에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추진 중이거나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으며, 녹색성장을 위해서도 정책수단의 개발과 이행을 구체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