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호주의 한 주류 매장 앞. 매장 유리 너머로 보이는 초록색 병 더미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와인도 위스키도 아닌 소주로 추정되는 병이 박스 수십 개와 함께 매장 입구에 진열돼 있던 것이다. “한인 마트도 아닌데?” 하는 호기심은 곧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정체는 바로 과일 소주였다. 수박, 망고, 복숭아, 요구르트.... 맛이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과일 소주들이 형형색색의 박스에 담겨 있었다. 언젠가 먹었던 과일 소주의 끝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작년 11월 호주의 한 주류 매장 입구에 과일 소주 박스가 쌓여 있다. 과일 소주는 작년 수출액 1억달러를 처음 넘기며, 일반 소주 수출액을 앞질렀다. / 이영관 기자

기자가 대학에 입학한 2015년, 당시 대학 신입생들에게 가장 유행했던 술은 과일 소주였다. 이걸 구하기 위해 각종 모임이나 학과 행사 때마다 전쟁을 치러야 했고, 먼저 그 술이 출시된 지역에 사는 가족과 지인 ‘찬스’로 이런 어려운 과제들을 해내곤 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유행이 과열됐다는 점. 거의 모든 주류 회사가 이 열풍에 뛰어들며 제품 숫자가 불과 1년 새 수십 개로 급증했고, 맛은 비슷하지만 이름만 다른 술들이 어느새 주류 매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사회가 유행을 권할수록, 유행은 더 빠르게 식어갔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고 싶다. 수많은 과일 소주가 우후죽순 생겨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최근 해외에선 과일 소주가 ‘원조’인 일반 소주보다 더 인기를 끌고 있다. 작년 수출액 1억달러를 처음 넘기며, 일반 소주 수출액(9600만달러)을 앞질렀다. 주류 업계에선 국내 주류 시장이 침체 중인 가운데, 과일 소주가 의외의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단맛을 지닌 하이볼이나 과일주에 익숙한 외국인들이 과일 소주를 더 익숙해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금세 외면한 과일 소주의 경쟁력에 문화와 음식 전반에 걸친 K열풍이 도화선이 됐다는 말이 나온다.

변화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가속화된다. 소주 ‘새로’의 도수가 일주일 전부터 0.3도 낮아지며 15.7도가 됐다는 걸 아시는지. 2022년 새로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참이슬 후레쉬’(16.5도)보다 0.5%포인트 낮추며 파격적인 인하였지만, 이번엔 예년보다 잠잠한 듯하다. 주류 업체들이 술을 멀리하는 유행을 반영해 도미노식으로 도수를 인하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 경쟁처럼 반복되는 도수 인하 속에 소주 본연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진다는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관심 없거나 진부한 이야기처럼 된 지금이다.

매일 새로운 유행이 쏟아지고 있다. 내일의 유행이 어제의 유행을 덮는 일상이 반복된다. 이런 시대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건 욕심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입 마셨을 때 잊고 있던 과거로 데려다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언젠가 만나기를 소망한다. 참고로, 그날 밤 호주에선 과일 소주를 구매하지 않았다. 2만원 가까운 돈을 추억에 쓸 용기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