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던 해외 브랜드들이 국내 패션 업체들에 “한국 스타일을 입혀달라”는 러브콜을 쏟아내고 있다. 과거만 해도 “브랜드 정체성을 건드리지 말라”며 한국 시장에 유통하는 역할만 맡기던 해외 패션 브랜드들이 달라진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해외 브랜드 제품의 국내 판권을 갖고 유통하는 데서 나아가, 한국 스타일을 입힌 제품으로 잇따른 성공을 거둔 결과다. 한국에서 통하면 세계에서 통한다는 공식이 패션 업계에서 입증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역할이 판매 대행사 내지 생산 하청업체에서 ‘공동 기획자’로 재정의되고 있다는 것이다.
◇韓 기획 제품이 수입 매출 처음 따라잡았다
미국 스포츠 브랜드 뉴발란스는 한국식 기획을 제품에 적용해 폭발적인 매출 성장을 이끌고 있는 대표 주자다. 최근 국내 패션 업계가 경기 침체로 주춤하는 가운데서도 성장세가 가파르다. 매출이 2024년 1조원을 기록하며 처음 ‘1조 클럽’에 들었고, 작년엔 1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뉴발란스는 글로벌 시장에서 스포츠 브랜드 매출 7~8위 안팎이지만, 한국에서는 나이키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뉴발란스가 한국에서 유독 잘나가는 배경엔 한국식 기획 제품이 있다. 국내 유통을 맡고 있는 이랜드그룹은 신발 제품은 글로벌에서 수입하고, 의류와 키즈 제품은 국내에서 기획하고 생산하는 ‘투 트랙’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국에선 진출 17년 만인 작년, 처음으로 자체 기획 제품이 매출의 50%를 차지하며 수입 제품 매출을 따라잡았다. 특히 한국의 아동복, 러닝 시장을 겨냥한 것이 주효했다. 뉴발란스 키즈 매출은 2021년 1700억원에서 작년 3000억원까지 늘었다. 이랜드그룹 관계자는 “한국 시장에 맞춰 설계한 제품의 매출 비율이 2010년대 초반 10~20%에서 최근 50%까지 오르며 매출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고 했다.
◇판매 대행에서 공동 기획자로
미국 골프웨어 브랜드 ‘지포어’는 원래 신발, 장갑이 주력 제품인데, 한국에선 의류 제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포어의 국내 유통을 맡은 코오롱FnC가 신발, 장갑은 직수입하고, 의류는 자체 기획해 제작하는 구조다. 지포어 VIP 고객만 초청하는 골프 대회를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여는 등 VIP 고객 대상 마케팅이 주효했다. 이런 기획력 덕분에 지포어는 중국과 일본 판권도 코오롱에 맡기기로 했다.
LF는 국내 유통을 맡고 있는 여러 브랜드 본사에 한국식 디자인을 먼저 제안하고 있다. 작년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포르테포르테’에 한국의 캐주얼과 셋업 트렌드를 반영한 ‘하트 로고 스웻셔츠 셋업’을, 미국 컨템포러리 브랜드 ‘빈스’ 본사에 한여름용 캐시미어 혼방 가디건을 제안해 각각 제품 출시를 이끌어냈다.
패션 ODM(제조자 개발 생산) 기업의 역할도 확대되고 있다. 과거 해외 브랜드의 요구대로 생산하는 역할이었지만, 이제는 한국의 트렌드를 반영한 디자인을 먼저 개발해 브랜드에게 제안하고 있다. 갭을 비롯한 미국 바이어로부터 매출의 90% 이상이 나오는 한세실업은 한국인 디자이너 숫자(130여명)를 지난 3년새 20% 늘렸다. 최근 AI(인공지능)를 활용해서 만든 디자인을 바이어에게 제안하는 팀을 신설했다. 한세실업 관계자는 “최근 제품을 수주하기 전 디자인과 샘플을 먼저 제작해서 바이어에게 제안하는 역할이 확대되며 인력을 충원했다”며 “특히 최근 미국 대형마트에서 의류 PB(자체 브랜드) 제품의 디자인과 생산을 맡아달라는 요구가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