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의 한 실험실에서 서울대 연구팀과 화장품 ODM(제조자 개발 생산) 기업 코스맥스의 연구원들이 손상된 모발을 복구하는 액체를 테스트하고 있다. 왼쪽부터 코스맥스 박세린 연구원, 코스맥스 정수경 팀장, 서울대 화학부 이연 교수, 서울대 박사과정생 황혜민씨. /장련성 기자

지난 20일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의 한 실험실. 연구원 4명이 유리 그릇에 담긴 머리카락 한 줌에 분무기로 투명한 액체를 뿌린 후, 현미경으로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연구원 중 두 명은 서울대 화학부 이연 교수 등 서울대 소속이지만, 나머지 2명은 화장품 ODM(제조자 개발 생산) 기업 코스맥스의 정수경 팀장과 박세린 연구원이었다. 이 연구팀은 지난해 손상된 모발을 강화하는 소재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는데 이날도 한참 성능을 검증하는 중이었다. 서울대와 기업의 연구원이 한 실험실에서 머리를 맞대게 된 것은 지난 2020년 시작된 코스맥스와 서울대의 특별한 산학 협력 프로젝트 덕이다.

코스맥스는 글로벌 4500개 브랜드의 제품 연구·개발에 참여하고 그들의 화장품을 생산해 공급하는 이 분야 글로벌 1위 기업이다. 하지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 위기감이 크다.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지난 2020년 서울대와 손을 잡았다. 국내 최고 수준 대학 연구진의 아이디어를 빌려 미래 신기술 확보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기업은 비용을 대고, 대학은 기업이 필요한 연구를 해 결과를 넘겨주는 통상적인 산학 협력의 기존 틀을 벗어나보기로 했다. 철저하게 소비자에게 판매할 제품 개발을 중심으로, 기업 연구원과 서울대 연구진의 칸막이를 없앤 원팀 연구에 나선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62억 투자해 1358억 매출로

코스맥스와 서울대의 산학 협력의 중심은 공동 설립한 연구소 ‘테크놀로지 인큐베이션 센터(TIC)’다. 코스맥스는 110억원을 서울대에 10년에 걸쳐 투자하고, 이 센터를 통해 2020년부터 5년 단위로 큰 틀에서 연구 방향을 설정하며 전체 프로젝트를 관리한다. 특히 이 산학 협력이 주목받는 이유는 기업이 학교에 돈을 대주는 역할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6년간 연구비 62억원이 투입됐는데 산학 협력으로 상용화된 제품이 총 97개, 매출액으론 누적 1358억원에 이른다. 특히 해를 거듭할수록 연구 결과와 제품 등이 누적되면서 매출액이 급증하는 추세다. 작년엔 1~8월 누적 매출액(781억원)이 재작년 연간 매출액(412억원)보다 90% 높았다.

코스맥스의 산학 협력은 철저히 ‘제품’을 중심에 두고 돌아간다는 게 비결이다. 서울대 농림생물자원학부 윤혜정 교수의 경우, 제지 등에 적용해 온 나노셀룰로오스 기술을 화장품 성분에 접목해 만든 제품으로 320억원의 매출을 만들어냈다. 식물 세포벽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를 나노(10억분의 1) 크기로 쪼개는 기술이 핵심이다. 셀룰로오스는 그물망처럼 얽히며 수분을 가두는 역할을 하는데, 나노 크기의 셀룰로오스로 화장품의 보습성을 대폭 높인 것이다. 그는 “다른 산학 협력과 달리 빠른 시간 내에 제품화가 되는 게 눈앞에 보이면서, 제품화를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코스맥스는 연구진을 독려하기 위해 매출의 0.5% 안팎을 포상으로도 주고 있다.

화장품 연구와 무관할 것 같은 비(非)이공계 분야와 협력을 주저하지 않는 것도 강점이다. 예를 들어 언론정보학과 홍석경 교수가 K팝 가수들의 메이크업을 분석한 ‘K-뷰티 색조 분석’ 연구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코스맥스는 이 결과를 글로벌 다수 고객사에 제품의 새로운 색상을 추천할 때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런 뜻밖의 효과를 기대하며 서울대에선 공과대, 의과대, 농업생명과학대 등 이공계뿐 아니라, 미술대·사회과학대를 합해 총 11개 단과대가 크고 작은 산학 협력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서울대 관계자는 “코스맥스와 2단계 연구에서 종합대학의 이점을 극대화해 여러 학문 융합을 보다 강화할 예정”이라고 했다.

◇연구와 생산 ‘칸막이’ 없앴다

코스맥스와 서울대 산학 협력의 또 다른 특이점은 ‘유연성’이다. TIC에서 매달 회의를 열어 주요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반기마다 모든 교수가 참여하는 연구 발표회가 열린다. 그러나 이런 정기 행사를 제외하면 연구 주제 설정부터 자유 방식이다. TIC 연구 책임자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김성재 교수는 “연구 과제를 2~3개월 먼저 진행한 뒤 다시 회의를 거쳐 1년짜리 본 과제로 계속 수행할지를 판단한다. 연구에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국가 과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학교가 연구, 기업이 생산을 맡는 식의 ‘칸막이’ 역시 희미하다. 연구 단계에서 코스맥스와 서울대 연구원들이 매주 미팅을 하며 피드백을 주고받고, 학교 차원에서 연구가 끝난 뒤에도 서울대 연구진이 코스맥스 연구소로 달려가 생산 단계에서 실험을 도와주는 일도 빈번하다. 이 교수는 “대량 생산 과정에서 비용을 낮추기 위해 코스맥스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며 “협업 과정에서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했다. 윤 교수는 “연속성이 다른 산학 협력과 가장 큰 차이”라며 “하나의 과제가 끝나고 생산 단계는 당신들 몫이니 ‘우리는 신경 안 쓰겠습니다’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잘될 수 있도록 돕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