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계기로 ‘집단소송제 확대’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범여권 의원들이 이 제도의 적용 대상을 지금보다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발의하고 나선 것이다. 쿠팡에 대한 비판 여론과 맞물려 정부와 정치권의 도입 기류가 거세지는 가운데, 이 제도가 확대될 경우 발생할 부작용에 대한 재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집단소송제는 일부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 결과가 같은 피해자 전체에 미치는 제도로, 국내에선 2005년 증권 분야(주가조작·허위공시 등)에 한해 도입됐다. 그간 확대 시도가 있었지만, 심각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대·중소기업들의 반대로 인해 무산됐다. 그런데 쿠팡 사태를 계기로 이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는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 집단소송제 확대론
지난달 31일 김남근 민주당 의원 등 범여권 의원 20여 명이 집단소송법안을 발의했다. 법안은 현재 증권 분야로 한정된 집단소송제 적용 범위를 개인정보·소비자 분쟁 등으로 넓히고, 100명 이상 피해자에게 위임받은 단체가 대기업을 상대로 책임 확인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고의적 불법 행위나 구제 지연이 있을 경우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도 가능하게 했다. 김 의원은 “미국 기업을 자처하는 쿠팡의 불법·위법 행위에 실효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집단소송제가 꼭 도입돼야 한다”고 언급했고,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도 국회 청문회에서 “집단소송제도 검토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는 이 같은 움직임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특히 소비재를 다루는 유통·식품 기업들의 공포가 크다. 한 대형 식품업체 관계자는 “제품에 작은 하자만 있어도 기획 소송이 남발되면서 법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형 유통업체들도 “법원 판결이 나기 전 ‘소송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소비자 분쟁이 제기되면 법적 판단 이전에 대개 기업이 도의적 사과와 선제적 보상을 한다”며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전제로 한 집단소송제까지 도입되면, 기업은 ‘여론 무마용 보상금’과 ‘천문학적 소송 비용’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집단소송제는 상장기업의 허위 공시 등 증권 분야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지난 2020년에도 집단소송제를 모든 분야로 확대 도입하는 법안이 입법 예고됐으나 중소기업의 68.6%가 집단소송제 도입을 반대(중소기업중앙회 조사)하는 등 주요 재계 단체들과 중소·중견 기업들이 반발해 무산됐다.
◇재계 “부작용 우려 큰데 反쿠팡 기류에 속앓이”
기업들이 우려하는 또 다른 이슈는 형평성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치권은 쿠팡을 손보겠다며 법을 만든다지만 정작 원인 제공자인 쿠팡은 소급 적용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 기업인 쿠팡이 저지른 사고 때문에 정작 국내 기업들만 힘들어지는 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는 ‘반(反)쿠팡 정서’ 때문에 속앓이만 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쿠팡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합리적인 우려조차 ‘기업 이기주의’로 매도될까 봐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고 전했다.
전문가들도 제도의 전면 확대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집단소송제가 확대되면 기업은 판결 전까지 ‘소송 당사자’로서 계속 대응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이는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집단소송은 미국에서도 ‘변호사만 배불리고 소비자들에겐 푼돈만 돌아가는 제도’라는 지적이 많다”며 “소송에만 수년이 걸리는 등 기업 경영만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작년 11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집단소송제가 정착된 선진국들도 기업 활동 위축과 소송 남발을 막기 위해 정교한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영국은 원칙적으로 참가 의사를 밝힌 사람에게만 판결 효력이 미치는 ‘참가 신고형’을 운용한다. 일본도 소비자 단체가 먼저 소송으로 기업의 배상 책임을 입증한 뒤 피해자들이 참여 여부를 선택하도록 했다. 패소가 명백한 소송까지 남발하는 것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낭비를 막기 위해서다.
☞집단소송제
대표 몇 명이 제기한 소송 결과가, 같은 피해를 본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미치도록 한 제도.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부터 도입됐지만, 상장기업의 허위공시 등 증권 분야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