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로템의 2층 전동차 '마리융(사업명 '시드니 NIF')'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州)의 다리 위를 달리고 있다. 이 열차는 시드니 센트럴역을 중심으로 시드니 북부·남부·서부 세 노선에 투입돼 총 309.1㎞ 구간을 달린다. /현대로템

지난달 27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州) 시드니 센트럴역. ‘마리융’(Mariyung)이라고 적힌 2층 전동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마리융은 호주의 국조(國鳥) 에뮤를 뜻하는 이 지역 원주민 말이다. 현대로템이 호주에 처음 내놓은 이 전동차는 지난달 본격 운행을 시작했다. 시속 160㎞로 지상을 달리는 8량짜리 열차로, 센트럴역을 중심으로 시드니 북부·남부·서부 세 노선에 투입돼 총 309.1㎞ 구간을 달린다.

객차 내부는 교통 약자를 위한 독특한 설계들이 곳곳에 반영됐다. 휠체어 탄 장애인이 접어 올리면 휠체어 전용 공간이 되는 접이식 의자, 보통 열차보다 넓은 통로 공간, 기둥을 최소화한 실내가 그런 예다. 열차 한 편성에 장애인용과 일반 화장실을 동시에 설치했고, 화장실 내에 인슐린 주사기 등을 처리할 수 있는 의료 폐기물 수거함도 있었다.

이 열차 객실 사이에 배치된 교통 약자 전용 공간이다. 접어 올릴 수 있는 의자를 배치해, 휠체어가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현대로템

◇2800번 설계 고친 ‘종이 열차’

현대로템은 이 전동차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13개월 동안 기관사 노조·장애인협회·안내견협회 등 단체에서 215회에 걸쳐 의견을 받았다. 실제 반영된 건의 사항이 총 2871건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오간 서류가 수천 개가 넘어, 현지에선 ‘종이 열차’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현대로템이 이렇게 까다로운 호주 사업에 집중하는 건 수익성 때문이다. 납품 단가가 국내의 배 이상이다. 단가가 높은 만큼 현대로템이 호주에 내놓는 열차에는 국내에 없는 미래 기술들이 여럿 접목돼 있다. 현지 조립으로 2027년 초기 물량을 납품할 예정인 QTMP 전동차에는 ‘전자식 높이 조절 장치’가 적용된다. 전동차가 각 역의 정보를 전달받아 서스펜션(현가장치)을 이용해 스스로 높이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열차가 도착하면 발판이 나오며 전동차와 플랫폼 사이의 빈 공간을 자동으로 채워주는 장치도 탑재된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호주는 역 시설이 낡아 역마다 플랫폼의 높이가 다르고, 플랫폼과 열차의 간격이 먼 곳도 있어 안전을 위해 적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세심한 설계를 앞세워 호주에서만 2조7000억원 계약을 따냈다. 현대로템의 단일 국가 수주액 중 최대 규모다. 현대로템으로선 최저가 입찰 방식 탓에 중소 업체에 점유율을 내줘야 하는 국내 시장의 한계를 호주를 비롯한 해외 시장 공략으로 극복한다는 전략이다.

◇‘아픈 손가락’ 철도 사업의 변화

현대로템은 고속철, 전동차를 주력으로 하는 철도와 K2 전차가 핵심인 방산이 양대 축이다. 방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철도 사업은 ‘아픈 손가락’으로 꼽혔다. 철도 사업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영업이익률이 1~2%대였고, 작년엔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해외 수주가 크게 늘고 있다. 현대로템은 지난 2월 모로코에서 한국 철도 업계 사상 최대 금액(약 2조 2000억원)의 계약을 따냈고, 지난해 미국 LA(약 8700억원), 우즈베키스탄(약 2700억원) 등에서도 계약을 따냈다. 올 3분기 현대로템의 철도 수주 잔고는 18조 28억원으로 작년 동기(13조 6563억원) 대비 32% 급증했다.

현대로템의 경쟁력은 납기 준수 능력과 품질이다. 마리융 수주 당시에도 세계 1위 업체인 중국의 중국중차(CRRC) 등이 입찰에 참여했지만, 앞서 호주에 진출한 중국 업체들이 납기와 품질 면에서 문제를 드러내 현대로템의 수주에 긍정적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배 현대로템 대표이사 사장은 “해외 곳곳에서 중국 대비 믿을 수 있는 기업이란 신뢰를 받고 있다”며 “내년 철도 부문 매출 첫 2조원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