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州) 시드니 센트럴역. ‘마리융’(Mariyung)이라고 적힌 2층 전동차가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현대로템이 제작해 작년 12월 가동한 NIF(New Intercity Fleet) 2층 전동차로, 지난달 3일 주정부의 최종 인수 승인(FA·Final Acceptance)을 받으며 본격 운행에 올랐다. 실내에 들어서자, 바닥에 커다란 장애인 휠체어 좌석 표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객실 좌석은 한 줄에 4개가 아닌 3개씩 배치했고, 열차 내 기둥을 최소화해 휠체어나 자전거 등을 들고도 열차 내 이동이 가능했다. 휠체어를 타고 센트럴역을 찾은 척수 장애인 협회 소속 그레그 킬레인(63)씨는 “오래된 전동차일수록 실내에 기둥이 많은데, 이 열차는 기둥이 거의 없어 이동이 편리하다”고 했다. 실내 계단의 높낮이를 낮게 설계하고, 장애인 전용 화장실을 배치하는 등 곳곳에 이동 약자를 위한 설계가 돋보였다.
◇2800번 설계 고친 ‘종이 열차’
NIF 2층 전동차는 현대로템의 첫 호주 사업이자, 본격적인 해외 공략 강화를 상징한다. 2016년 610량에 1조 5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수주, 올 6월까지 모든 수량을 납품 완료했다. 이 전동차는 호주에서 ‘종이 열차’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실제 열차를 재현한 목업을 만들어 13개월 동안 기관사 노조·장애인협회·안내견협회·자전거 협회 등 단체에서 215회에 걸쳐 의견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종이 문서가 수천 개가 넘는다는 것이다. 실제 열차 디자인과 설계에 반영된 건의 사항 숫자가 총 2871건에 이른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호주 정부가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을 둔 현지 문화에 따라, 교통 약자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특수한 설계를 입찰 단계부터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프로젝트와 비교해 몇 배 많은 문서가 오갔다”고 했다.
현대로템이 이렇게 까다로운 호주 사업에 집중하는 건 높은 수익성 때문이다. 2023년 퀸즐랜드주 도로교통부와 맺은 1조2000억원 규모 QTMP(Queensland Train Manufacturing Program) 전동차 계약을 합하면, 호주에서만 2조7000억원 계약을 따냈다. 현대로템의 단일 국가 수주액 중 최대 규모다. 호주 정부는 2032년 브리즈번 올림픽을 앞두고 철도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고, 향후 10년간 철도 인프라에 약 28조원을 투입하겠다는 예산안을 작년 발표했다.
◇저가 경쟁하는 국내선 볼 수 없는 기술들
현대로템은 국내에선 최저가 입찰 방식 때문에 중소 업체들에 점유율을 내주고, 철도 부문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상태다. 국내 철도 입찰은 1단계에서 최소 평가 기준을 충족하고 2단계에서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 기술력과 적기 납품 보장성 등이 낮더라도 채택되는 구조다. 한 철도 업계 관계자는 “호주에 납품하는 열차 단가는 국내 단가의 배 이상”이라며 “한국에서 타는 차량들은 낮은 가격대에 맞출 수밖에 없고,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적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현대로템이 호주에 내놓는 열차에는 국내에 없는 미래 기술들이 여럿 접목돼 있다. 현지에서 조립해 2027년 초기 물량을 납품할 예정인 QTMP 전동차에는 ‘전자식 높이 조절 장치’(ELC·Electric Leveling Control)가 적용될 예정이다. 현대로템이 최초로 전동차에 적용하는 기술로, 전동차가 각 역의 정보를 전달받아 서스펜션(현가장치)을 이용해 스스로 높이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전동차와 플랫폼 사이의 빈 공간을 자동으로 채워주는 ‘열차-승강장 간격 보정장치’도 탑재된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호주는 역사 시설이 노후화돼 각 역마다 플랫폼의 높이가 다르고, 플랫폼과 열차의 간격이 먼 곳도 있어 안전을 위해 적용한 것”이라고 했다.
◇‘아픈 손가락’ 철도 사업의 변화
현대로템은 고속철, 전동차를 주력으로 하는 철도, K2 전차가 핵심인 방산이 양대 핵심 사업이다. 1977년 창립 당시 화물 열차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현재 국내에서 고속 열차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다. 최근 방산 사업은 호조를 거듭하는 반면, 철도 사업은 상대적으로 부진을 못 벗어나 ‘아픈 손가락’으로 꼽혔다. 작년 기준 철도 사업 매출액은 약 1조5000억원으로, 방산 사업(약 2조4000억원)에 9000억원 안팎 뒤처졌다. 2010년대만 해도 철도 매출액이 방산의 두 배를 넘었지만, 2023년부터 역전당했다. 영업이익률도 2020년대 들어 1~2%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호주를 비롯한 해외 수주에 힘입어 실적을 개선하고 있다. 올 1~3분기 영업이익은 177억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16% 늘었다. 특히 2016년 호주 사업이 해외에서 ‘모범 사례’로 꼽히며 현대로템의 해외 수주를 넓히는 사례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모로코에서 국내 철도 역사상 최대 해외 수주 기록(약 2조 2000억원)을 세웠고, 2024년엔 미국 LA(약 8700억원)와 보스턴(5700억원), 우즈벡(2700억원) 등에서 계약을 따냈다. 올 3분기 현대로템의 철도 수주 잔고는 18조28억원으로 작년 동기(13조6563억원) 대비 32% 늘었다.
현대로템이 호주를 비롯한 시장에서 세계 1위 중국을 앞지를 수 있던 배경으로는 곳곳에서 신뢰를 형성했단 점이 꼽힌다. 전세계 철도 업체 중 1위는 중국 중국중차(점유율 23.4%)이고, 유럽과 일본 업체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최대 업체인 현대로템은 13위다. 김정훈 현대로템 철도사업본부 본부장(전무)은 “중국 업체들은 최초 입찰에서 가격을 낮게 제시한 뒤 실제 사업 이행 과정에서 납품이 지연되고, 품질 문제에 대한 해결이 늦어지는 사례가 많다”며 “호주 퀸즐랜드는 2032년 하계 올림픽을 위한 사업인 만큼, 적기 납품에 신뢰를 바탕으로 수주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