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경제부총리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 부처와 통화 당국 수장들이 18일 오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모였다. 홍 부총리가 주재한 ‘거시경제금융회의’였다. 이 자리가 파한 후, 이 총재와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문이 닫힌 회의장에 남아 밀담을 나눴다. 전일 한은이 금융위원회를 향해 “빅브러더가 되려고 하는가”라며 적나라한 비난을 공개적(‘입장문’)으로 퍼부은 터여서 긴장감이 흘렀다. 양측 갈등의 계기가 된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과 관련해 날 세운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평소 ‘절간’이란 별칭으로 불릴 만큼 제 목소리를 내지 않던 한은은 이번에 금융위를 향해 이례적으로 강한 공격을 했다. 네이버·카카오페이 등 빅테크 기업을 통한 결제 내역을 금융위가 수집·관리하는 것은 ‘빅브러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계에서는 “이름부터 어려운 이 법안이 중앙은행과 금융 당국이 핏대 올려가며 싸울 만큼 엄청난 사안일까”란 얘기가 나온다. 더 깊은 ‘속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커지는 ‘빅테크 금융’ 누가 통제할 것인가
네이버·카카오 등은 최근 금융으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IT 기업 등을 통한 간편결제는 일평균 2139억원으로 2년 전의 2배 수준으로 늘었다. 이렇게 커지는 빅테크 결제에 대한 ‘통제권’은 한은·금융위엔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결제’는 한은의 고유 역할 중 하나인 지급결제(여러 금융사 사이 자금 정산)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한은은 금융위가 이 결제와 관련한 데이터를 수집·관리하겠다고 함으로써 한은의 고유 영역을 침범한다고 주장한다.
금융위는 부인한다. 빅테크 결제가 커지는 가운데 소비자 보호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18일 금융위 후원으로 열린 전금법 개정안 관련 세미나에서 정성구 김앤장 변호사는 “빅테크가 도산하면 제3의 관리 기관이 소비자에게 돈을 배분해줘야 한다. 이런 측면에선 전금법 개정안 방향이 맞는다”고 말했다.
◇조용한 빅테크, 이유는 후불 결제 ‘당근’
당사자인 빅테크 회사의 목소리는 정작 들리지 않는다. 데이터를 가져간다고 하면 반발할 법도 한데 조용하다. 전금법 개정안엔 빅테크 회사가 금융으로 손을 뻗는 데 꼭 필요한, 후불 결제 허용이란 ‘당근’이 포함돼 있다. 후불 결제란 신용카드처럼 물건을 먼저 사고 돈을 나중에 지불해도 되는 서비스다.
신용카드사 관계자는 “금융위가 사실상 IT 회사에 신용카드업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는 18일 네이버가 전금법 개정 전에도 ‘샌드박스’라는 형식을 통해 후불 결제 서비스(30만원까지)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빅테크 회사 입장에선 굳이 개인 정보 문제로 금융위의 심기를 건드릴 이유가 없다.
◇금융결제원 둔 ‘자리 전쟁’
금융위는 빅테크 기업의 결제 데이터 수집·관리를 금융결제원(금결원)에 맡기겠다고 하고 있다. 금결원은 그런데 금융위 산하 기관이 아니다. 한국은행이 사원총회 의장으로 있는 사단법인이다. 전통적으로 한은 출신이 원장으로 간다. 그런데 2019년부터 꼬였다. 한은 총재가 지명한 인사에 대해 한은 노조가 강하게 반발했고, 한은이 대안을 빨리 내지 못하는 사이 금융위 출신인 김학수 원장이 비(非)한은 인사론 처음으로 원장에 올랐다.
한은은 그 자리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상황이다. 금융위는 그러나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하자”는 식으로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계속 흘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빅테크 페이 데이터 수집을 금결원에 맡기는 법안을 금융위 마음대로 상정(17일)하자 한은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금융위 발목 잡은 ‘중국 모범 사례’
한은은 17일 금융위를 비난하는 입장문에 ‘중국에도 없는 사례’라고 여러 차례 적었다. 중국은 그런데 왜 튀어나왔을까.
빌미는 금융위가 제공했다. 지난해 7월 발표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디지털 금융 종합혁신방안’에서 빅테크 결제 데이터 수집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았다. 그러면서 중국이 빅테크 결제 전용 감독 당국 왕롄(網聯)을 통해 결제를 관리한다고 적었다. 하지만 한은이 인민은행에까지 연락해 확인한 결과 왕롄은 은행과 빅테크사 사이의 거래 내역만 관리할 뿐, 금융위 안처럼 빅테크 내부에서 이뤄지는 추후 거래에 대한 데이터까지는 모으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위 측은 “왕롄의 문제의식을 차용하겠다는 얘기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충수를 둬서 제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