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밤 11시 유흥주점이 빽빽이 들어선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 뒷골목은 네온사인만 반짝였다. 호객꾼조차 눈에 잘 안 띄었다. 유흥주점 실장으로 일한다는 김모씨는 “지금 시간이 절정인데 코로나 전에는 꽉 차던 50개 룸이 오늘은 대부분 비어 있다”고 했다. 인근에서 만난 택시기사 김재승씨는 “옛날 같으면 단란주점에서 나오는 취객 손님 받으려고 새벽까지 대기하는 택시가 많았는데, 요즘은 11시만 넘으면 사람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관철동 젊음의 거리 일대가 밤 9시가 다가오며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0.8.31/연합뉴스

지난 1월부터 퍼진 코로나가 9개월 만에 한국의 밤을 바꾸고 있다. 식당·카페·노래방·유흥주점·헬스장에서 먹고 마시고 놀고 운동하던 퇴근 후 밤 문화가 ‘홈쿡’ ‘홈술’ ‘홈파티’처럼 집안으로 옮겨간 것이다. 밤 문화의 변화는 ‘밤 경제’ 실종으로 이어졌고, 이는 ‘마이너스(-) 10% 경제’를 고착화하고 있다.

30일 본지가 전국 66만 소상공인 사업장 매출을 관리하는 한국신용데이터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사회적 거리 두기'는 9월 중순부터 2단계, 1단계로 계속 완화됐지만 전국 소상공인 매출은 6주 연속 작년 대비 -10%를 기록하고 있다. 주간 매출은 작년 수준을 거의 회복했지만, 야간(오후 6시~자정) 매출이 ‘-20%’ 벽을 좀처럼 넘지 못한 탓이다. 정부가 거리 두기를 완화해도 밤 경제는 회복이 안 되는 것이다.

연세대·이화여대 등 대학이 몰린 서울 신촌 거리도 밤 10시가 되면 문을 닫는 식당이 수두룩했다. 문을 연 곳도 고작 한두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었다. 갈비집 사장 최모(74)씨는 “우리는 100석 갖춘 단체 예약 전문점인데, 오늘은 갈비탕 두 그릇 판 게 전부”라며 “대학은 비대면 개강 하지 회사는 회식하지 말라니 술 마시고 놀던 밤 문화가 바뀌는 것 같다”고 했다.

핼러윈 앞둔 이태원 - 핼러윈을 하루 앞둔 30일 오후 8시, 서울 대표 번화가인 이태원 거리는 다른 해에 비해 한산했다. 코로나가 퍼진 지 9개월 만에 비대면, 거리 두기 여파로 밤 문화가 변하며‘밤 경제’도 함께 실종됐다. /고운호 기자

28일 오후 8시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300석 규모 PC방엔 손님이 60여 명만 있었다. 원래 PC방은 퇴근 직후인 오후 7시부터가 대목이다. 아르바이트생 김민재(22)씨는 “코로나 전엔 120명 정도 찼는데 지금은 절반도 안 된다”고 했다. 인터넷콘텐츠서비스(PC방)협동조합 최윤식 이사장은 “저녁 손님이 30% 정도는 빠졌다”고 했다. 오후 9시 30분 서울 광화문의 한 스포츠클럽도 회원과 강사를 포함해 7명만 운동 중이었다. 대기업 본사와 오피스텔이 밀집해 퇴근 후 운동족(族)으로 북적였던 곳이었다.

◇'밤 경제' 실종

‘밤 경제’의 실종은 식당·술집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신용데이터의 지난주 업종별 소상공인 매출을 보면 야식(작년 대비 -31%), 유흥시설(-30%), 치킨(-28%), 숙박(-28%), 술집(-21%), 당구장(-16%) 등 ‘저녁 장사’로 먹고사는 업종들이 모두 부진했다.

자영업자들은 “단지 ‘코로나가 무서워서’라는 것 이상의 복합적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화여대 앞에서 사주 카페 ‘에로스’를 운영하는 김태범(39) 대표는 “상인들끼리 ‘요즘 젊은이들이 쓸 돈이 없을 것’이란 얘기를 많이 한다”며 “가게들도 장사 안 되고, 최저임금이 오르니 알바를 아예 안 쓰게 되고 젊은이들도 돈 벌기가 쉽지 않아 소비가 한정되는 것 같다”고 했다.

전국 소상공인 매출 추이

동료끼리 부어라 마셔라 회식 대신 가족과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는 선진국형 ‘나이트 라이프’가 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캐나다에서 10년 거주하다 신촌에 수제맥줏집을 차린 최원석(36) 대표는 “퇴근해 일찍 귀가하고, 집에 모여 파티하는 외국 밤 문화가 코로나 때문에 강제 이식된 것 같다”며 “코로나로 지하철 막차 시간이 1시간 앞당겨진 것도 사람들 습관을 바꾸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모든 데이터는 ‘집’을 향한다

‘-10% 경제’를 만든, 코로나의 밤은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모든 데이터는 ‘집’을 향하고 있다.

1~9월 편의점 매출을 보니 소주·전통주와 와인·위스키 판매는 각각 20.5%, 34.5% 늘었다. 숙취 해소제는 7.9% 줄었다. ‘술 취해 귀가하는 대신 집에 가서 마신다’는 뜻이다. 국내 한 맥주 제조사의 1~9월 판매량 비중을 보면 대형마트·수퍼에서 파는 가정용 비중은 1년 새 52%에서 60%로 늘고, 식당·유흥주점 등 업소용은 48%에서 40%로 줄었다. 직장인 윤상성(37)씨는 “코로나 이후 외부 약속을 최대한 줄이고 친구들 집으로 불러 같이 보드 게임을 하면서, 조촐한 술 파티하는데 훨씬 쾌적하고 좋다”고 했다.

코로나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면서 가전, 가구 매출도 일제히 뛰었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7~9월) TV·가전 영업이익이 역대 최대(1조5600억원)를 기록했고, 가구업계 1위인 한샘도 3분기 영업익이 작년보다 236% 늘었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공부하는 ‘사이버대(大)’의 올 2학기 지원율은 치솟았고,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서 가정용 노래방 기기·운동기기·게임용 의자는 작년보다 80~110%씩 더 팔린다. 대학생 권용민(23)씨는 “개강 파티나 MT, 미팅 같은 바깥 활동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했다.

신촌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모씨는 “코로나가 종식돼도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며 “습관이란 게 무서운데 9개월 만에 문화 자체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코로나는 기존 라이프스타일을 파괴하고, 4차 산업혁명을 가속화하는 ‘파괴적 촉진’을 일으켰다"며 “모든 이가 디지털 마인드로 전환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