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뉴스를 보다가 문득 든 생각. 난데 없이 예멘 난민 신청자 458명이 제주도로 찾아와 갈등이 빚어지고(2018), 반일 불매 운동이 골목 상권을 휩쓸며(2019), 선거철 결정된 긴급 재난 지원금으로 ‘소고기 국거리’를 사게 될 것(2020)이라고 일찌감치 내다 본 사람이 있었을까. 가만히 돌이켜보니, 기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6년 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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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를린 특파원이던 2015년 여름,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 아테네에 머물면서 ‘포퓰리즘 광풍’을 취재할 때 일이다. 당시 국제 채권단은 그리스 정부에 구제 금융을 연장해주는 대신, 고강도 경제 개혁을 요구한 상태였다. 하지만 반(反)긴축 정책을 내세워 승리한 좌파 정권은 ‘허리띠 조이기’를 거부했고, 채권단 개혁 수용안을 ‘찬반 투표’에 부치며 나라를 두 동강 내고 있었다.
아테네 도심은 ‘부자를 먹어 치우자(Eat the Rich!)’ 같은 섬뜩한 문구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표식들이 온통 뒤덮고 있었다. 거리에는 공산당 깃발을 흔들며 나랏돈을 더 풀라고 요구하는 시위대까지 등장했다. 최고급 백화점은 1990년대 동네 쇼핑센터처럼 낡아 있었고, 명문 아테네 대학교에서 만난 젊은 인재들은 인터뷰에서 하나 같이 “고국을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어 ‘카오스(chaos)’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듯 싶었다.
#2. 그해 10월엔 독일의 반(反)이슬람 극우 단체인 ‘페기다(PEGIDA·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 시위를 취재하러 드레스덴에 다녀왔다. 아무래도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 분명하다. ‘반(反)난민 시위대’는 아테네 집회 못지 않은 ‘프로 시위꾼’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들은 “난민을 적극 수용하겠다”고 밝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메르켈을 교수형에 처하는 사진, 부르카(이슬람 여성 전통 복식)를 입힌 그림을 뿌리며, 독일 전역으로 세(勢)를 불려 나갔다. 평범한 중산층 시민까지 호응하면서, 이 단체 대표가 세운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2017년 독일 제3당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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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다. 좌파 정권의 도덕적 해이, 포퓰리즘 정책, 최악의 경제 위기와 난민 사태 같은 문제들은 우리나라 현실과는 동 떨어진 먼 나라 얘기일 뿐이며, 앞으로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직접 발로 뛰었던 현장들은 그저 서울로 돌아가면 로그아웃 될 일종의 ‘가상 현실(VR)’ 같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열기가 한반도에 닥칠 거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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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한 가족의 삶을 좌우한다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 짓고 살지 않는 이상, 개인의 삶은 국가의 거시적인 정책 결정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 누군가 부른 죽창가 때문에 지방 소도시 일식당 주인의 밥줄이 끊길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이제 ‘경험’으로 안다.
BBC가 HBO와 손 잡고 만든 6부작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 Years·2019)’는 이 같은 문제 의식을 담아 낸 공상 과학(SF) 드라마다. 영국 맨체스터에 사는 평범한 가족이 정치·외교·경제·과학기술의 거대한 변화에 휩싸이며 격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다. 평소 시사 뉴스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묵직한 시대 흐름을 드론 촬영하듯 멀리서 조망하다가, 한 개인의 내밀한 생활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기분이다.
시대 배경은 2019년부터 2034년까지, 15년이다. 세계 정치에 불고 있는 스트롱맨(strongman·강성 지도자) 열풍, 격화하는 미·중 갈등, 불안정한 금융 시스템, 초연결 메타버스(metaverse·가상현실사회),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난민 문제 등이 한 개인에게 어떤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디테일하게 그렸다. 드라마에선 지겹던 BBC 뉴스가 익사이팅해질수록, 개인의 일상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아이큐 70 이하는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 “난민 문제는 관심 없다” 같은 막말·기행으로 단숨에 정권을 장악한 포퓰리스트, 은행 파산으로 전(全)재산과 직업을 잃고 자전거 배달부가 된 긱 워커(gig worker·임시직 노동자), 신체에 디지털 기술을 이식하고, 아예 로봇으로 변신하고 싶어하는 ‘트랜스 휴먼’, 평소 ‘깨어있는 시민’을 자처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말하지만 보수당을 몰래 찍는 동성애자 같이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를 다루면서도, 영국 특유의 냉소적 유머와 경쾌함을 놓치지 않았다.
◇15년 뒤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와 보자. 최근 신문에서 접한 소식들은 다음과 같다.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중국이 반발하는 ‘대만해협’과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북한인권’ 문제가 모두 포함됐다. 중국 금융 당국은 자국 내 가상 화폐 발행과 거래를 원천 봉쇄하는 초강력 규제안을 발표했다. 국내에선 우리 정부가 눈 감고 있는 사이 가상 화폐 폭탄이 터질 위기에 임박했다.
코로나 장기화로 외식업 종사자, 보험 설계사, 연극 배우 소득이 크게 줄었고, 택배 기사와 개발자 소득이 크게 늘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기본소득론’,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신복지제도’,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청년 1인에게 1억원을 뿌리는 ‘사회적 상속’ 개념을 띄우고 있다.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서도 월 50만원 ‘청년 기본소득’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윤석열 지지 모임인 ‘공정과 상식’ 포럼에선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에 위협”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는 한·미 반도체 협력을 위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을 청와대에 건의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뒤면 2036년이다. 미래의 나는 ‘20년 진보 집권론’이 거론된 시절을 기억할까. 그때 우린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개요 SF 드라마 l 영국 l 2019 l 6부작(각 55~58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특징 본격 투표 장려 드라마
⭐평점 IMDb 8.3/10 🍅로튼토마토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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