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열린 독일 쾰른시장 선거에 나선 무소속 헨리에테 레커(여·59)는 당선 소식을 병원에서 들었다. 레커는 하루 전 시장에서 유세 도중 난민 유입에 반대하는 한 남성이 휘두른 칼에 목이 찔려 중상을 입었다. 난민 수용 시설에 대한 방화 등 최근 외국인 혐오 범죄가 잇따르는 가운데 유력 정치인마저 테러의 대상이 되자 독일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독일은 그동안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5% 안팎에 머무르는 등 유럽 주요국 가운데 이민자에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초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난민 적극 수용' 의사를 밝힌 후 독일마저 반(反)이민 정서가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후 독일 동부 드레스덴시(市) 극장광장 앞. 시민 9000여 명이 모여 "메르켈은 물러나라! (Merkel muss weg!)"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반(反)이슬람 단체 '페기다(PEGIDA·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가 주최한 시위였다. '페기다'는 매주 월요일 중동 이민자와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년 전 드레스덴에서 시작한 시위는 베를린·프랑크푸르트·함부르크·쾰른 등 주요 도시로 퍼졌고, 참가자 수도 늘고 있다.
타티아나 페스털링(여·50) 페기다 대표가 연단에 서서 "메르켈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라고 외치자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8월 이후 매주 집회에 나온 페터 뮬러(37)씨는 "지금처럼 외국인이 들어오면 독일의 정체성은 사라질 것"이라며 "나는 결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인보다 훨씬 아이를 많이 낳는 중동 출신 난민들이 조만간 독일을 점령할지 모른다"며 "그땐 내가 이방인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정비사 패트릭 크루거(25)씨는 "정치적 난민 수용은 찬성하지만 지금처럼 오로지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난민 쓰나미'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기도 싫고 세금을 내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한때 일부 극단적인 세력의 주장으로 치부됐던 반이민 구호는 점점 일반인 사이로 퍼지고 있다. 국제 여론조사 기관 유거브(YouGov)가 지난 9~13일까지 독일인 119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56%가 "난민 신청자 수가 많다"고 답했다. 석 달 전보다 14%포인트나 많아진 것이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함부르크에서 열린 난민촌 신설 반대 시위에 전형적인 중산층 시민들이 참가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독일의 반이민 정서 확산이 중요한 것은 유럽연합(EU)의 난민 정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난민 수용에 적극적이던 메르켈은 국내 반이민 여론에 떠밀려 입장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메르켈은 18일 터키로 직접 달려가 EU의 30억유로(약 4조원) 재정 지원을 대가로 터키에 20만명 규모의 난민 수용소를 건설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난민 행렬을 터키에서 멈춰 세우겠다는 것이다. EU는 지난 15일 정상회의에서 난민 유입을 줄이고 EU 외부 국경 통제를 강화하기로 합의하는 등 난민 대책의 중심을 수용에서 통제로 조금씩 바꾸는 중이다.
헝가리는 지난달 17일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남부 국경을 전격 폐쇄했다. 슬로베니아도 18일 하루 난민 수용 인원을 2500명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발칸반도를 거쳐 서·북유럽으로 향하던 난민 수천명의 발이 묶여 크로아티아 접경 지역은 거대한 난민촌으로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