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1~3대 대통령과 박정희 5~9대 대통령. /조선일보 DB

25일 자 신문 A16면에, 최근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 미 의회도서관에서 발굴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편지에 대해 기사를 썼다. 병상의 이승만이 로박시살이라는 새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고, 이유식을 먹으면서 버티고 있다는 1962년 11월의 편지가 소개됐다.

이승만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것은 귀국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이 하와이로 간 것은 장기 망명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몇 주 동안 요양하고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여행 가방 몇 개만 챙겨 간 것이었다. ‘죽기 전에 다시 고국 땅을 밟겠다’는 이승만의 의지에 따라 프란체스카와 지인들은 1962년 3월 17일을 귀국일로 잡았으나, 당일 아침 출발 채비를 마쳤을 때 주하와이 총영사관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그것은 ‘귀국 만류’라는 한국 정부의 뜻이었다. 87세의 이승만은 그날 입원했다.

이승만의 귀국을 막은 사람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단히 미워했던 것 같다. ‘눈이 어두운 독재자’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3·15 부정선거 직후엔 이승만을 몰아내려는 군사정변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계승하려 하지 않았다. 이승만을 혐오했고 극복하려 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의 지지층(?)이 겹치는 건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개인적인 호오(好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긴 역사에서 두 사람이 남긴 영향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한 시대와 정부를 대변하는 두 사람이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긴 시간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이 문제에 대해 분석한 적이 있다. 2024년 2월 23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공동 주최로 열린 세미나 ‘건국·부국 대통령, 이승만·박정희의 현대정치사적 의의’였다.

이승만 정부(1948~1960)와 박정희 정부(1961~1979) 사이에는 4·19와 5·16으로 인해 권력 구조가 바뀌는 ‘혁명적인 단층’이 분명 존재했다. 우선 주류 세력에 차이가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일제 시기 엘리트를 주축으로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에선 이승만 정부 때 국내 교육을 받았거나 해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가 충원됐다.

인위적인 물갈이도 있었다. 박정희는 ‘실체가 불분명한 독립운동 경력을 기반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자유당과 민주당의 해방 귀족’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와 기억 속 ‘이승만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은 선양했다. 하와이로 간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한 반면 남산에 김구 동상을 세웠고, 망우리에 있던 안창호의 무덤을 강남으로 이장해 도산공원을 조성했다.

1955년 11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군의 3군단을 찾아 박정희 5사단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사람이 함께 촬영된 희귀한 사진이다. /대한뉴스·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에는 그런 ‘부정(否定)’ 선언도 막을 수 없는 연속성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일관된 반공 사상.

―세계 자본주의 진영에 편승한 반(反)식민주의 모델 구축.

―한미 동맹에 기반한 한미 관계 발전.

―세계 냉전 시기 정전(armistice) 체제 유지를 통한 평화 지속.

―소박하고 근면한 인간성의 추구.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에 국군 파병을 모색했던 이승만 정부의 노력이 박정희 정부에서 월남 파병으로 이어짐.

―통일 과업의 목표와 의지.

물론 부정적인 연속성도 분명 존재했다. 3선 개헌 이후의 정치적 몰락과 집권 후반기의 소통 단절 같은 것들.

김명섭 교수는 이렇게 정리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시대는 호국(護國)의 연속성이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두 대통령의 시기에 구축된 국가 안보에 기반해서 산업화와 민주화가 촉진됐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을까? “다른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역시 정치적 과오가 있었다. 그러나 그 두 대통령의 긍정적 연속성을 기억하지 않고서는 세계를 향해 오늘날의 ‘K모델’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대한민국 현대사는 ①호국 ②건국과 부국 ③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세 개의 흐름이 빚어낸 3중 나선형 구조였다는 것이다.

전쟁과 고난의 시대를 살며 리더십을 키웠던 이승만과 박정희는 스스로를 보수 기득권층과 싸우는 ‘혁명가’로 인식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보수 우파’가 아니라 변화를 추구했던 ‘진보 우파’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날 세미나에서 가장 여운이 길게 남은 것은 이런 말이었다.

“김일성, 박헌영, 마오쩌둥, 호찌민은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이승만과 박정희는 공(功)을 뺀 채 과(過)만 취사선택해서 기억하도록 한다면, 이게 과연 공정한 것이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승만이 세워 놓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박정희는 모든 국민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건설했다. 이승만은 마치 자신이 만든 변법에 의해 희생됐던 진(秦)나라의 상앙처럼 자신이 이룩한 그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박정희는 세월이 흐른 뒤 ‘자기들이 태어난 나라가 원래부터 그랬는 줄 착각하는’ 세대에 의해 ‘왜 경제 발전을 핑계 대고 민주주의를 버렸느냐’는 질타를 받는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사실상 종신 집권을 향한 길을 걸었던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 또한 분명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한강의 기적 중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명섭 교수의 발표문에서, 두 사람의 공통점에 대해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학술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애국심(愛國心)이었다. 무턱대고 민족만 외쳐대거나 방향을 잃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실천 가능하고 구체적인 설계를 심어 놓은, 대단히 실용주의적인 애국심이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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