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지금 로박시살(Robaxisal)이라는 새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어요. 이 약은 매우 고통스러웠던 다리 경련을 멈추게 해 줬어요. 남편은 이제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지내게 됐네요. 그리고 이유식과 아이스크림, 호박 파이 같은 걸 먹고 있을 뿐이에요.”
1962년 12월 11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 여사가 캐서린 렘니처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는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리먼 렘니처 장군의 아내로, 한국에서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였다.
1965년 7월 이승만이 서거하기 전, 5년 2개월에 걸친 하와이 체류 기간 동안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긴 편지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 최근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수집한 이 자료는 프란체스카가 캐서린 렘니처에게 보낸 편지들로 모두 6통이 새롭게 발굴됐다. 이승만 서거 전 프란체스카가 남긴 마지막 편지로, 당시 이승만의 상태와 그를 간병하던 프란체스카의 상황 및 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1962년 3월 1일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지난 편지에서 저는 서울 측에서 밴 플리트(6·25 당시 미8군 사령관) 장군을 통해 접촉을 시도해 보라고 조언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그는 성공이 확실하지 않은 일에는 어떠한 것도 맡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저는 여전히 이승만 박사와 함께 귀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의 하와이행(行)은 장기 망명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부부는 몇 주 동안 요양하고 돌아올 생각으로 여행 가방 몇 개만 챙겨 떠났으나, 예상치 못하게 귀국 길이 막혔다. 동포들로부터 가구와 밥솥·냄비, 반찬과 생활비 등 십시일반 도움을 받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이발도 하지 않았다. 가정부도 없이 살림을 도맡았던 프란체스카는 ‘가난했던 독립운동 시절처럼 생활했다’고 회고했다.
죽기 전에 다시 조국 땅을 밟겠다는 이승만의 의지에 따라 프란체스카와 지인들은 1962년 3월 17일을 귀국일로 잡았다. 프란체스카의 3월 1일 편지는 당시의 강렬한 귀국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당일 아침 출발 채비를 마쳤을 때 주하와이 한국 총영사로부터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를 받았다. 87세의 이승만은 이때부터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다.
그리고 2년 남짓 흐른 1964년 8월 4일의 편지. “4월 이후로 혈압 조절을 위해 약을 복용하고 계시지만, 여전히 혈압이 다소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잘 버티고 계십니다. 이유식도 비교적 잘 드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주무십니다.” 이 편지에선 경무대에서 키우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하와이로 데리고 온 개 ‘해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곳은 고지대에 비가 많이 내리고 흙이 붉어 저는 종종 그(해피)의 긴 털을 다듬어 줘야 합니다. …해피는 하루 종일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브래디(렘니처의 개)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1965년 4월 26일의 편지 내용은 이렇다. “최씨(최백렬 하와이 동지회장)가 제 남편의 생일(3월 26일)과 그다음 주 일요일에 사진을 몇 장 찍었지만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잠들어 가는 제 남편은 자세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잠을 방해받은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다른 날에는 환하게 웃곤 했는데, 이날만큼은 사진기를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웃지 않았습니다.” 생애 마지막 생일인 90세의 생일에 이승만은 웃지 않았고 사진 촬영도 거부했다. 그로부터 두 달 남짓 지난 7월 19일 이승만은 영면했다. 그는 죽고 나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일(26일)은 이승만 탄생 151주년이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