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아시아 네트워크의 중심축이었습니다.” 국내 몇 명 되지 않는 발해사(史) 연구자 중 한 명인 윤재운(56·사진)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말했다. 그는 최근 이 내용을 실증적으로 밝힌 연구서 ‘발해 로드’(평사리)를 냈다.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알려졌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북방의 나라’ 정도로 발해에 대해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얘기다.
흔히 ‘발해는 사료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윤 교수는 다른 전공자들과 함께 2023년 중국·러시아·북한에 흩어진 모든 발해 유적을 수록한 4권 분량 ‘발해 유적 총람’을 낼 정도로 발해의 고고학적 흔적을 꼼꼼히 연구하고 현지를 답사했다. 그리고 ‘네트워크’를 통해 발해 역사의 새로운 복원을 시도했다.
아시아 대륙 내 최소 7개 네트워크의 중심에 발해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기존 기록에 중국으로 가는 압록도(조공도)와 영주도, 서쪽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 남쪽 신라로 가는 신라도, 동쪽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의 다섯 개 길이 알려져 있었지만, 먼 중앙아시아까지 닿는 ‘담비길(Sable Road)’과 지금의 하바롭스크 일대인 북쪽 흑수말갈로 이어지는 ‘흑수도’도 존재했다.
“이것은 발해가 당시 아시아 물류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해는 모피동물 가죽 중 가장 고급품이었던 담비 모피의 가공과 수출을 도맡았고, 발해 사절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모피를 얻으려는 지배층이 몰려들었다. 담비길은 초원을 지나 서쪽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까지 이어졌는데, 그곳에 살던 소그드인의 낙타 뼈 유물이 동해와 인접한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출토됐다.
발해의 네트워크는 육상·수상·해상 교통수단을 망라했고, 강이 얼면 개썰매가 수로를 빠르게 달리기도 했다. 윤 교수는 “발해는 우리 역사상 흔치 않았던 사통팔달의 나라였고, 한류보다 1000여 년 앞서 ‘발류(渤流)’를 전파했던 세계 교류의 DNA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라는 오해가 있는 것에 대해 윤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발해 멸망 당시 20만명이 고려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고려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많은 숫자였죠.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여겼다면 넘어간 쪽이나 받은 쪽이나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속설은 발해의 신개척지에 한정된 상황이었으며, 발해인의 대다수는 고구려계였다고 윤 교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