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역사 유적지 중 대표적인 것이 슈리성(首里城)이다. 1879년 이전, 오키나와가 일본이 아니라 류큐(琉球) 왕국이었던 시절 왕궁이었던 곳이다. 태평양전쟁으로 많은 유적과 유물이 파괴됐고 2019년에 복원된 정전(正殿)마저 불과 9개월 만의 화재로 전소돼 다시 짓고 있을 정도로 수난이 많았던 곳이다.
그런데 드물게 화마를 피해 남아 있는 유적이 성벽 구석 종각 안에 매달려 있는 ‘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이다. 만국진량이란 ‘세계로 건너간다’ ‘세계의 가교’ 정도의 뜻이다. 종 모양은 일본식에 가까운데 높이 154.9㎝, 둘레 93.1㎝, 무게는 721㎏이다. 류큐 제1왕조 시절인 1458년에 제작됐다. 이때는 조선에선 세조 4년이며 단종이 영월에서 죽은 다음 해였다. 원래 슈리성 정전에 걸려 있던 종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뭔가.
종 앞에 설치된 설명문을 읽던 중 뜻밖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종에는 ‘류큐 왕국은 남쪽 바다의 아름다운 나라이며 조선, 중국, 일본과 사이에 있어 만국을 잇는 다리로서, 무역으로 번영하는 나라이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지난날 해양 왕국으로서 자랑스러운 기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주변국을 열거하는 순서였다. ‘조선, 중국, 일본’이라고? 세 나라 중에서 류큐에서 거리가 가장 먼 곳이 조선인데, 왜 조선을 중국보다 앞서 가장 먼저 언급했던 걸까?
아무래도 종에 새겨진 명문의 원문을 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슈리성에 있는 종은 복제품이었다. 육안으로는 복제 종의 명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실물은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에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시간을 내서 박물관으로 찾아갔다. 종은 1층 전시실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실물 종 앞에는 명문을 자세히 설명한 안내판이 있었다.
그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脣齒, 在此二中間, 湧出之蓬萊島也. (유구국자, 남해승지, 이종삼한지수, 이대명위보거, 이일역위순치, 재차이중간, 용출지봉래도야.) (구두점은 필자)
명문의 원문은 이런 뜻이었다. ‘유구국은 남해의 아름다운 땅이다. 삼한(三韓)의 빼어난 것들을 모았고, 명나라와는 덧방나무와 바퀴 관계가 되며, 일본과는 입술과 이의 관계가 된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서 솟아난 낙원의 섬이다.’ 종(鍾)이란 글자가 동사로 사용될 때는 ‘모으다’라는 뜻이다.
삼한? 삼한이라니! 삼한지수라니! 이 말은 한반도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주로 ‘내부자’들이 쓴 용어였다. 삼한은 원래 마한, 진한, 변한을 통칭하는 용어였지만 후대에는 ‘삼한일통’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빼어남을 모은 나라는 어디인가. 바로 고려였다.
당시 외국인이라면 한반도를 ‘고려’나 ‘조선’(이 국명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으로 지칭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문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삼한’이란 곳이 류큐국 또는 류큐인의 원류라는 정체성이 드러난다. 류큐가 먼저 삼한의 문화를 갖춘 뒤에 중국·일본과 관계를 설정했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1458년 이전에 한반도에서 류큐로 이동한 사람들의 후손이 썼다면 무척 자연스러운 내용이라는 것이 된다.
1458년 이전 한반도에서 류큐, 즉 오키나와로 이동한 사람들? 벌써 19년이 됐는데,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탐라와 유구(류큐) 왕국’ 특별전을 준비하던 학예관들이 묘한 유물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들은 오키나와에서 빌려 온 13~14세기 수막새(수키와가 이어진 처마 끝을 장식하는 기와)를 보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그건 제주박물관이 소장한 한국의 13세기 기와 유물과 대단히 흡사했기 때문이다. 둥근 원 주위로 연꽃 잎들이 새겨졌고, 테두리엔 연속적인 점 무늬가 있는 모습이,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한국 기와 유물은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바로 삼별초의 항전지였다.
결정적인 ‘증거’로 보이는 것이 오키나와의 대여 유물 중 암키와에서 나왔다. 친절하게도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 빙고.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마지막 항쟁을 벌인 해가 바로 계유년인 1273년이었다.
이제 학계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 삼별초 세력은 제주도에서 모두 궤멸된 것이 아니라, 그 일부가 오키나와로 이동해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추정은 이어졌다. 삼별초가 한국사에서 사라진 12세기부터 오키나와에선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됐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큰 성도 축조됐다. 고려에서 이주한 세력의 이 같은 활동이 1429년 류큐 왕국 수립에 기여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1458년 ‘만국진량의 종’에 명문을 새긴 사람 역시 삼별초의 후예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국진량의 종 명문의 내용을 우리나라 사람 중 본 사람이 이미 많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랬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많은 사람이 그 내용을 알고 있었고, 관련 콘텐츠도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문장에 한반도가 강 먼저 나오는 탓에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류큐 왕족이 한반도 출신이라 그렇다는 등 온갖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중이기도 하다.’
글쎄, 이게 그냥 ‘국뽕’으로 치부하고 말 일일까. 만약 ‘삼별초의 잔여 세력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그곳에 비로소 문명의 시작을 이뤘다’고 한다면 국뽕이겠지만, 세계사 어느 국면에서도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건너갔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이미 그곳엔 문명이 존재했고, 삼별초 세력은 류큐 문화를 이루는 데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아직 가설일 뿐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고려의 일부 세력이 외세의 압박에 쫓겨 머나먼 오키나와로 이주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한국사의 아픈 역사 중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랬을 경우 그들은 두 번 다시 한국사의 영역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하지만 인력과 문화와 문명의 교류라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오히려 한반도와 오키나와 사이에 14~15세기 이전 그런 일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이상할 것이다.
결국 삼별초의 후예였을 한 지식인이 1458년 류큐 왕궁에 걸어 둔 그 종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문을 새겼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 조상이 살던) 삼한의 빼어남을 모아 (이룩한 문화를 지니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자리 잡은 낙원이 됐다’고 말이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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