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고우영 만화 '초한지' 앞부분에서 유방과 한신 등 등장인물을 해설한 부분. 아무래도 한국에선 이 만화가 초한지의 표준인 것 같다.

이것은 인터넷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장이고, 이상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은 내용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고전 역사소설로는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수호지를 들 수 있다.’

그런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다들 지(誌) 또는 지(志)로 끝나는 ‘지’ 시리즈인 듯하고, 이걸 정리한 사람은 나름대로 저 네 책을 시대순으로 배열하려 애쓴 듯하다. 심지어 이 네 책이 중국의 ‘4대기서’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4대기서는 금병매 삼국지, 서유기, 수호전(=수호지)이며, 8대기서로 따진다면 이 네 권과 금고기관, 요재지이, 유림외사, 홍루몽을 말한다(이상 가나다순). 뒤의 네 권은 국내에선 사실상 생소한 책이지만.

‘삼국지’는 너무나 유명한 책이니 넘어가자. ‘수호지’는 역사소설로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는데, 주인공 108영웅 중 실존 인물은 송강 한 사람뿐이며 (실제로는 그다지 영웅도 아니었다) 나머지는 모두 가공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뭔가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맞으니 그렇다고 치자. 춘추전국시대의 장구한 역사를 다룬 ‘열국지’는 원제가 ‘동주열국지(東周列國誌)’다. 춘추시대 전체와 전국시대 대부분이 천자국인 주(周)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겨 존속한 시기라서 ‘동주’라는 말이 붙었다. 하지만 동주열국지는 줄여서 열국지라고도 하고 김구용이 번역한 옛 민음사 책은 표지에 ‘동주’란 글자를 작게 표기하기도 했다. 명나라 때 풍몽룡이 엮어 낸 책을 청나라 건륭제 때 채원방이 다시 지금과 같이 정리했다. 실체가 분명한 책이다.

문제는 ‘초한지(楚漢誌)’다. 왜? 그게 어때서?

이렇듯 반문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거 서점 가면 다 있는 책인데, 당연히 고전 아닌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전국 6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죽은 뒤 한(漢)의 유방과 초(楚)의 항우가 천하를 놓고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는, 마치 장기판과도 같은 스토리가 초한지인데. 장량과 한신을 비롯한 숱한 영웅들이 함께 등장해 지록위마와 홍문지연과 사면초가와 금의환향과 다다익선을 비롯한 온갖 고사성어를 역사에 새기는 이야기가 초한지인데.

문제는… 정작 중국에 그런 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국 여러 곳의 서점에 가 봐도 그런 책은 없고, 인터넷 세상이 된 뒤 검색을 해 봐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가끔 생각날 때만 찾아본 것이기 때문에 더 깊게 파고들 계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큰 의문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초한지’라고 알고 있는 그 역사소설의 정체는 도대체 뭐였나? 원본이 있긴 있었던 건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분명 같은 시대의 같은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로서 주로 팔린 책은 1980년대 초까지 팔봉 김기진의 창작인 것처럼 시장에 나온 ‘통일천하(統一天下)’였다. 이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삼국지는 역시 월탄 박종화의 번역본이었다. 사실 이 책이 우리나라 삼국지의 표준이자 디폴트와도 같았다. 팔봉의 통일천하 역시 ‘그 책’ 계열에선 같은 역할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54~5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원고였다.

김팔봉(팔봉 김기진)의 '통일천하'. 1984년 '초한지'란 새 제목으로 재출간됐다.

그런데 1984년, 당시 월탄 삼국지를 출간하던 출판사 어문각에서 새로운 장정의 가로쓰기 책이 나왔다. 세 권 분량의 ‘초한지’였다. 초한지라니… 마치 삼국지나 수호지의 자매편 같지 않은가? 그런데 알고 보니 팔봉이 쓴 책이었다. 다만 ‘저자’에서 ‘역자’로 위치를 바꿨다. 하지만 옛 세로쓰기 ‘통일천하’와 똑같은 원고인데 제목과 활자만 바꾼 것이었다. 도대체 왜 제목을 바꾼 거지?

사실 이런 의문이 들 만도 한데, 당시엔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팔봉의 초한지 한 해 전인 1983년 1월부터 일간스포츠에 고우영이 연재한 만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한지’였다. 고우영 만화의 인기 때문에 팔봉의 책 제목을 아예 바꾼 셈이었다. 심지어 팔봉은 그 시점에 아직 생존해 있었는데도 말이다. 제목을 바꿔 다시 출간된 뒤 팔봉의 ‘초한지’는 자연스럽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초한지’라는 명쾌한 제목을 처음 쓴 사람은 고우영이었나? 사실 얼마 전까지도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초한지’라는 새 제목의 생명력은 무척 탄탄했으니, 2002년 동아일보에 초한 쟁패 이야기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를 쓴 이문열은 2008년 그 원고를 출간할 때 역시 ‘초한지’라는 제목을 썼다. 제목이 ‘왕적성연(王的盛演)’으로 초한쟁패기의 이야기를 다룬 2012년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이 ‘초한지: 영웅의 부활’로 바뀌었다.

기자가 돼서 취재를 다니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묵은 의문이 풀리는 때가 종종 있다. 초야의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김영문 박사가 진수의 정사(正史)는 물론 배송지의 주(注)까지 국내 처음으로 완역한 ‘정사 삼국지’가 최근 출간됐다. 경북 칠곡의 자택으로 가서 인터뷰를 했는데 서가에 그가 번역한 3권 분량의 ‘원본 초한지’란 책이 꽂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초한지라는 책은 원래 없는 것 아닌가요?” 김 박사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그 원전은 도대체 뭡니까?”

그것은 명나라 때 나온 ‘서한연의(西漢演義)’였다. 작가는 견위(甄偉)란 사람이었다. ‘사기’와 ‘한서’ 같은 정사를 바탕으로 하고 민간 설화를 취사선택해 소설로 엮은 이 책이 바로 ‘통일천하’와 ‘초한지’의 원전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미 언해본이 나왔고, 우리 문학과 문화에 그 내용이 깊이 녹아들었던 텍스트였다. 우리나라에선 한때 ‘초한연의’라 불리기도 했지만 원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김영문 박사는 ‘원본 초한지’란 제목으로 2019년에 ‘서한연의’의 첫 완역본을 낸 것이었다. 서한연의의 첫 완역본인데도 서한연의라는 이름을 되찾지는 못했고 또 초한지란 제목을 썼다. 김 박사는 “서한연의를 토대로 해서 부분적으로 개작한 것이 팔봉 김기진의 ‘통일천하’였다”고 설명했다.

사실 서한연의라는 제목이라면 누가 알겠는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한(漢)나라를 주로 ‘전한-후한’이라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중국에선 ‘서한-동한’이라고 한다. 전한의 수도 장안은 서쪽에 있었고 후한의 수도 낙양은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한과 동한이 동시에 존재한 것이 아니며 시간상의 전·후기 때문에 ‘전한-후한’ 쪽이 훨씬 더 논리적이지만 말이다.

사실 국내에서는 팔봉의 ‘통일천하’란 제목이 한동안 표준이었기 때문에 다른 작가의 아류작 역시 통일천하란 제목으로 나왔었다. 그런데… 도대체 ‘초한지’라는 제목을 처음 쓴 책은 누구의 책이었던가?

여기에 대해 김영문 박사는 명쾌한 답변을 줬다. “사실 저도 최근에 책 번역을 하며 조사하는 과정에서 처음 알게 된 것입니다.”

1966년 소설가 방기환이 써 출판한 '초한지'. 현재까지 확인된 책 중 '초한지'란 제목을 쓴 최초의 서적이다. /김영문 박사

그것은 1966년 문교출판사에서 동양걸작선집 중 한 권으로 나온 책 ‘초한지’였다. 역자는 소설가 방기환(方基煥·1923~1993)이었다. 1947년 아동지 ‘소년’을 창간했고, 1981년 그가 쓴 역사소설 ‘어우동’은 아무도 몰랐던 특이한 역사 인물을 발굴한 것으로 이름 높았다고 한다.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의 1985년 영화 ‘어우동’의 원작자가 바로 방기환이었다.

방기환이 쓴 '초한지'의 서지 부분. /김영문 박사

방기환의 ‘초한지’와 고우영의 ‘초한지’ 사이에는 또 하나의 초한지가 있었으니, 1980년 정공채가 쓴 대가출판사의 ‘대초한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의문이 풀렸다. ‘초한지’라는 책이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한국 작가 방기환이 중국 책 ‘서한연의’의 번역서를 내던 1960년대에 ‘초한지’라는 새로운 제목을 창작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책 이름은 1983년 고우영 만화에 의해 유명해지면서 마치 중국에도 그런 제목의 책이 있는 것처럼 한국인에게 인식됐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초한지’는 없었다. 최소한 1966년까지는.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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