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영웅’에서 자객(리롄제)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

장이머우 감독, 리롄제(이연걸) 주연의 2002년 영화 ‘영웅’은 중국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227년 발생한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숱한 문학 작품과 영화·드라마로 재현됐고, 자객인 형가(荊軻)는 관우·악비 등과 함께 중국 역사의 대중적인 영웅으로 꼽혀 왔다. 천카이거 감독의 1999년 영화 제목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형가가 진왕을 찌르다)’에서 보듯, 다들 형가가 칼로 진왕 정(政·훗날의 진시황)을 찔렀으나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그와 달랐을 가능성이 국내 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김병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인문·역사 분야 유명 학술지인 계간 ‘문헌과 해석’ 100호에서 해당 사건을 기록한 사마천 ‘사기(史記)’의 자객열전을 새롭게 분석했다.

‘사기’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찔렀다’에 해당하는 글자로 ‘자(刺·pierce)’자가 아닌 ‘침(揕·thrust)’자를 썼다. 반면 전저·예양·섭정 등 같은 열전의 다른 자객들의 기록에선 모두 ‘자’ 자를 사용했다. 김 교수는 ‘침’ 자가 춘추시대 노나라 조말이 제환공을 겁박한 사건을 묘사한 ‘관자’의 기록에서도 쓰인 점에 주목했다.

이것은 형가가 실제로는 진왕을 칼로 ‘찌른’ 것이 아니라 칼을 들이대고 ‘겁박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 김 교수는 “지금까지 모두 ‘침’의 의미를 오독해 사건의 진상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형가가 죽기 전에 ‘당신을 살려 놓은 채 약속을 받으려 했다’고 한 말을 보면 진왕을 찌르려 한 것이 아니라 거사를 사주한 연(燕)나라 측에 유리한 약조를 받아내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칼로 찔렀으나 실패했다’는 해석 탓에 형가는 무공이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의심되기도 했으나, 자객의 자질은 충분했다는 것이다.

형가의 비수에는 맹독이 묻어 있어 칼날이 스치기만 해도 진왕은 죽었을 것이지만 일부러 죽이지 않고 겁만 줬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진왕 겁박은 원래 형가를 사주한 연나라 태자 단(丹)의 계획이었는데,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사마천은 태자 단이 자객의 ‘후원자’로서 자격 미달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