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화서국에서 출간된 정사(正史) ‘삼국지’ 원문부터 ‘후한서’ ‘자치통감’과 일본어 삼국지 해설본까지, 한형수(81)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연구실 서가에는 수백 권의 삼국지 관련 서적이 꽂혀 있다. 한 교수는 39명의 삼국지 등장인물을 상세히 분석한 4권 분량의 삼국지 인물론을 모두 완성했다. 정년 무렵 시작해 꼬박 17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최근 출간한 ‘삼국지 유비 한실(漢室) 꿈 펼친 모신(謀臣) 무장들’과 ‘삼국지 조조 천하 꿈 펼친 모신 무장들’(이상 박영사) 두 권이 그가 쓴 책이다. 삼국 중 촉한과 위나라의 인물에 대해 썼다. 2018년 출간했던 ‘삼국지 군웅할거 인물론’(절판)에서 후한 말의 인물을 다뤘고, 다 써놨지만 아직 출간되지 않은 오나라 편까지 합하면 총 4권의 삼국지 인물론을 쓴 것이다.
개론서나 입문서 수준의 책이 아니다. 잘 알려진 소설 ‘삼국지연의’는 참고만 했을 뿐,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와 방대한 분량의 배송지(裴松之) 주석 같은 숱한 원 자료를 샅샅이 분석했고, 카를 융의 인물 분석 이론까지 원용한 저작이다. 홍윤기 고려대 중문학과 교수가 “중국 전문가들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한 정확한 번역”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그런데 저자인 한형수 교수의 전공은 무엇이었을까. 한문학이나 역사학이 아니라 뜻밖에도 사회학이었다. 노인 복지와 사회 정책이 그의 전공 분야였다. 전공 연구를 위해 미뤄 놨던 삼국지 연구의 꿈이 퇴직 뒤에 활짝 피어난 셈이다. 1992년 ‘삼국지를 사랑하는 교수들의 모임’을 만든 그는 청두·우한·뤄양 등 삼국지의 현장을 20번 넘게 답사했고, 일반인 대상 삼국지 강의를 17년 동안 이어 왔다.
“유비와 조조는 모두 내향적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유비가 ‘내향적 감정형’이라면 조조는 ‘내향적 사고형’이었죠.” 21세기에 가장 필요한 리더십은 누구에게서 보이느냐고 묻자 한 교수는 유비라고 대답했다. “그가 누구 밑에서 실무자로 일했다면 무능하다는 말을 들었겠지만, 지도자라는 위치에서 보면 인재를 알아보는 감식 능력, 한번 그 밑에 들어오면 배신하지 않는 포용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심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은 성격 탓에 형주를 손권으로부터 빌린 것인지 자신이 차지한 것인지 불분명하게 처리함으로써 훗날의 화근을 만들었다.
“조조에게는 정책 수행의 전문성, 손권에게는 등거리 외교와 균형 능력이라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인재였던 관우와 장비는 각각 교만과 포악 때문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소설에서 능력이 과장된 제갈량은 전략가라기보다는 정치가였고, 조운(조자룡)을 자세히 보면 큰 군대를 이끈 지휘관이 아니라 소규모 기동타격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삼국지에 빠졌던 걸까. 이 질문을 들은 팔순 노인의 얼굴에 잠시 십대 소년 같은 화색이 돌았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처음 접했는데, 도서관 벤치에서 관우의 단기천리(單騎千里) 대목을 읽던 중 바람이 불어 대나무 숲이 흔들렸고, 그 순간 ‘역사는 흐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했다. 한 교수는 “삼국지엔 온갖 흉계와 권모술수도 있지만, 격동기를 꿰뚫는 성찰과 그 속에서 명멸하는 온갖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결국 인간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고,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인간 의지의 작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