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테마로 한 이 ‘돌발史전’ 시리즈에선 가끔 한국 현대 예능사(藝能史)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별세했을 때 그를 소재로 한 글을 썼다. 물론 다른 뉴스에는 좀처럼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2022년 6월의 송해 관련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06/10/METPBCUI6JFXHDSWCO4T4APKLI/ 지난 5월의 이상용 관련 기사(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5/05/16/RGU6SPXMM5FAHCXBJEWLZHWIAE/)였다.
이번엔 한국 현대 연극사(演劇史)에 반드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에 대한 글이다. 지난 19일 세상을 떠난 배우 윤석화(1956~2025)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 글은 가독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장황한 데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다량 함유돼 있다. 하지만 모두 진심이다.
돌이켜 보면 어린 내가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종로 거리에 붙어 있던 연극 포스터에서였다. 1985년 초쯤 됐을 것이다. ‘꿀맛’이라는 연극이었는데 한 여성의 얼굴 사진 말고 다른 요소가 없는 포스터는 처음 봤기에 신기했다. 그녀가 윤석화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윤석화를 세상에 알린 1975년의 데뷔작이었다. 윤석화는 1983년 ‘신의 아그네스’로 공연계의 수퍼스타가 됐다. 수차례 재공연을 한 뒤 내 눈에 그 포스터가 보였을 것이다. 참 밝고 예쁜 얼굴이었는데 TV에 나오는 탤런트와는 다른 진한 개성과 고집이 담겨 있는 듯했다.
1985년에 윤석화는 TV 드라마에 나왔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KBS의 ‘고향’이었다. 밤무대 가수로 집에 와서도 늘 통기타를 끼고 사는 ‘정임이’라는 캐릭터였다. 발성과 표정이 특이했다. 뭔가 오래 끓인 사골 국물처럼 진했다. 아, 저런 것이 연극 연기인가. 잡지에서 윤석화가 ‘방송 대본이 하루 전에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 오, 맙소사를 외쳤다’는 얘길 봤다. 드라마 속 윤석화는 기타를 잘 쳤고 노래도 잘 불렀다. 그녀가 ‘오란씨’ CM송을 불렀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잠시 ‘고향’이라는 드라마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장나라의 아버지인 주호성이었는데, 극 중반에 갑자기 주호성의 아버지 역으로 대배우 추송웅이 나왔다. 얼굴이 닮아서라고 했다. 추송웅은 잡지에서 ‘누구하고 닮았다는 이유로 캐스팅되긴 처음’이라며 투덜댔다. 1985년 9월에 종영한 이 드라마는 추송웅의 마지막 TV 작품이 됐다. 그해 12월 추송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1987년은 윤석화가 대중적인 히로인으로 올라선 해였다고 할 수 있다. 신성일의 상대역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 ‘레테의 연가’가 개봉했다. 또 국내 최초의 미니시리즈인 MBC ‘불새’에서 유인촌·이미숙과 함께 주연을 맡았다. 장총을 들고 유인촌을 쏘는 마지막 장면, 윤석화의 살기 어린 연기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레테의 연가’는 이문열, ‘불새’는 최인호 원작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장관을 지낸 유인촌과 연극 ‘햄릿’에서 재회한 윤석화는 내게 두고두고 자랑하듯 ‘불새’ 얘기를 하곤 했다. 자기들은 그때 정말 당대의 청춘 스타였다고.
그런데 영화와 TV에서 성공했는데도 윤석화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1988년 ‘하나를 위한 이중주’, 1992년 ‘딸에게 보내는 편지’, 1995년 ‘덕혜옹주’, 1997년 ‘나, 김수임’ 같은 연극이 계속 성공했고 공연계에서 그녀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윤석화는 젊은 나이에 전설처럼 자리 잡았다.
1991년 가을, 대학생이던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틈만 나면 대학로를 찾아 연극 수십 편을 봤다. 소극장 연극의 세계에 돌연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인생과 전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가 2014년에야 극적으로 연결되는 그때, 할인가로 한 편에 3000원이면 볼 수 있었던 소극장 연극들은 그야말로 인문학의 극적인 3D 프린터와도 같았다. 사실 그때 그런 프린터는 없었지만.
윤석화를 무대에서 처음 본 연극이 그해 상연된 ‘출세기’였다.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본 그 연극은 웬만한 한국 연극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었지만, 유독 윤석화의 연기는 형광등처럼 빛이 났다. 주인공(길용우)의 아내와 가수 1인 2역을 했는데, 삶에 찌든 가난하고 순박한 여인이 다음 장면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마이크를 흔들며 ‘오동동타령’을 꽥꽥 불러대는 연기는 귀신을 보는 듯한 수준이었다. 당시 이 연극에 출연하고 귀가하려던 윤석화를 이경규가 몰래카메라로 괴롭힌 적이 있다. 다른 연극들에서 윤석화는 섬세하고 우아했으며 친근하고 따뜻했다. 텅 빈 무대에 그녀 혼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베르메르나 르누아르의 명화가 서서히 그려지는 것 같았다.
1995년 윤석화는 뮤지컬 ‘명성황후’ 무대에 올랐다. 비극을 승화하는 연기력과 특기인 노래를 모두 무대에 쏟아낸 그 작품은 뮤지컬 판이 아직 초기였던 한국에서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윤석화는 세상의 정점에 선 듯했다. 그런데 1997년에 그녀의 공연 인생 중 최초의 시련이 찾아왔다. 제작자 윤호진이 ‘명성황후’의 브로드웨이 진출 과정에서 돌연 주연 여배우를 교체했던 것이다.
윤호진은 훗날 ‘브로드웨이 수준의 가창력을 갖춘 작품을 위해선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뮤지컬은 지금처럼 연극과는 별개의 예술 분야로 여겨졌던 게 아니라 ‘연극 배우들이 나와 노래하는 연극’ 정도로 인식됐었다. 윤호진은 그걸 깨고 싶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윤석화의 말은 달랐다. ‘명성황후’ 얘기를 할 때마다 “작품을 성공시킨 주인공은 나인데 제대로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며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 윤석화와 윤호진이 재회해 겉으로나마 화해한 것은 2017년 대학로 수현재씨어터(현 예스24스테이지)에서 열린 윤호진의 연극 ‘찌질의 역사’ 시연회에서였다.
1998년 나는 첫 직장으로 한 공기업에 다녔는데, 퇴사 후 두 번 다시 마주칠 일 없기를 바랐던 나이 어린 여성 고참이 윤석화를 닮은 외모였다. 그때 잠시 윤석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일보 입사 동기였다가 회사를 나간 친구가 월간 ‘객석’에서 일했는데 2001년 결혼을 했다. 그런데 주례를 맡은 사람이 ‘객석’을 운영하던 윤석화였다.
그녀가 주례석에 서자 홀 전체가 돌연 환해진 듯했다. 윤석화는 “저를 보시려면 최소 10만원이 넘는 티켓을 사셔야 할 텐데 여러분은 행운”이라고 농담을 던진 뒤 원고를 보지 않고 무대에서처럼 열정적인 주례사를 펼쳐냈다. 아아, 그런데 이건 좀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결혼식장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돼야 할 대상은 마땅히 신부여야 할 텐데, 그날 식장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인물은 신부가 아니라 윤석화였기 때문이다.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한동안은 너무나 바빠서 대학로에 갈 여유가 없었다. 기자로서 윤석화를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2005년 5월의 일이었다. 회사 주최 전시인 ‘대영박물관 한국전’을 윤석화와 닉 라일리 GM대우 사장이 함께 관람하는 모습을 취재해 기사를 쓰는 임무가 내게 주어졌다. 사실 이것은 원래 월간 ‘객석’의 한 코너로 마련한 자리였고 ‘객석’ 측에서 취재 나온 사람은 음악평론가 한정호였다. 내가 놀랐던 것은 뉴욕에서 연극 공부를 하고 왔다는 윤석화의 영어 실력이 현지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당시 뉴욕대에서 4과목을 수강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수료’인 줄 잘못 알았다고 했다). 한정호와 나는 그녀의 뒤에 서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윤석화는 대영박물관전 관람을 “호사스런 신선놀음”이라고 표현해 편집기자가 제목을 쉽게 뽑도록 해 주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7년 8월, 윤석화는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된다. ‘신정아 스캔들’ 이후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허위 학력 파문이 불거졌고, 기자들이 윤석화를 취재하기 시작하자 그는 새벽에 인터뷰를 자청해 ‘이화여대를 다닌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것은 신문의 사회면 톱 기사로 실렸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연극계는 발칵 뒤집혔다. 물론 다니지도 않았던 이화여대를 다녔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윤석화를 좋아했던 것이, 이화여대를 다녔기 때문이었나?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녀는 무대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통해 객석의 관객과 함께 숨을 쉬고 감정을 나누며, 부박한 삶의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힘을 선사해 왔다.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세련되고 우아하며 효과적이고 감동적으로 수행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다.
학력 파동 직후 윤석화가 무대에 다시 서지 못한 것은 아니다. 연기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2008년 ‘신의 아그네스’, 2009년 ‘시간이 흐를수록’에 출연했다. 그리고 2010년 이윤택 연출 ‘베니스의 상인’에서 김소희와 더블 캐스팅돼 포샤 역으로 출연한 것을 끝으로 배우로서의 시간이 일시 멈췄다. 그게 5년이나 지속됐다. 연극 연출과 기획 등의 일이 더 많아져서였을까. 일각에선 ‘아무래도 학력 파동 이후 심적 동요가 컸던 탓에 연기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2013년에 윤석화는 또 한 번 시련을 맞는다. 남편인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이 조세 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세운 페이퍼컴퍼니에 윤석화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윤석화는 ‘어려움에 처한 남편을 돕기 위해 이름만 빌려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예정이던 연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개막 두 달을 앞두고 취소됐다. 이것은 과연 공연이 취소될 정도의 과오였을까. 아직도 판단이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사람들은 이 일에 ‘가짜 이대생’만큼의 관심이 없었다.
다음 해인 2014년, 나는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공연 분야를 담당하게 됐다. ‘배우 윤석화’가 활동을 멈춘 지 5년째 되는 해였다. 그동안 윤석화는 다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영국에서 제작한 뮤지컬 ‘탑 햇’으로 로런스 올리비에 어워즈를 수상했던 것이다.
공연 담당 기자로서 처음 만난 윤석화는 배우가 아니라 ‘공연 제작자’였다.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탑 햇’의 국내 공연을 앞두고 사전 홍보를 위해 신문사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 모습만큼이나 ‘제작자 윤석화’의 모습은 생소했다. 뜻밖에도 9년 전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언니 이름이 ‘윤석재’이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별의별 뮤지컬이 극장에서 상연됐던 2010년대 한국 공연계에서 웬일로 ‘탑 햇’은 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제작사 ‘돌꽃컴퍼니’의 대표로서 윤석화는 연극 연출도 맡았다. 안중근 의사가 주인공인 연극 ‘나는 너다’였다. 안중근과 아들 안준생의 1인 2역을 한 배우가 맡고 의병 역 배우들이 나신으로 등장하는 이 연극은 모호하고 혼미한 시공간을 관객이 알아서 헤매야 하는 ‘편하게 보기 힘든 연극’이었다. 2015년 1월 이 연극을 뮤지컬 전용 극장인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했다. 사실은 ‘탑 햇’이 예정돼 있었다가 취소된 빈자리를 연극으로 대신 때우는 모험을 했던 것이다.
송일국과 박정자라는 호화 캐스팅이었지만 공연장 입지가 좋지 않았고, 연극 티켓 가격이 무려 10만원이었다. 반쯤은 텅 빈 객석이 눈에 밟혔다. 그래도 윤석화는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나신 장면에 대해선 “나는 지금껏 무대에 설 때마다 발가벗고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연출자 인터뷰가 더 연극 대사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연극이 끝나자 압구정동 아파트 주민 풍의 노인 관객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입구에 서서 다른 관객이 다 나갈 때까지 우레 같은 박수를 치던 광경을 잊기 힘들다.
그래도 이 기사는 나의 첫 윤석화 인터뷰였다.
그리고 2015년 5월, 마침내 ‘배우 윤석화’가 돌아왔다.
거장 연출가 임영웅의 연출 60주년을 기념해 본인이 직접 만든 모노드라마,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한 ‘먼 그대’였다.
연극은, 윤석화가 5년 만에 서는 무대는, 실로 마음을 흠뻑 온수로 적시는 듯 따사로운 공연이었다. 그걸 내가 공연 담당 기자로서 취재해서 기사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은 연극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아, 연극이란 것이 이렇게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구나’ ‘소극장이란 곳이 이렇게도 편안한 곳이로구나’라고 느끼게 할 만한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65분의 소극장 행복’이라 할 만했다.
모노드라마를 통해 복귀한 ‘배우 윤석화’는 이제 조금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해가 바뀐 2016년, 그녀는 과거의 히트작 ‘마스터 클래스’를 다시 무대에 올리고 직접 출연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윤석화를 두 번째 인터뷰한 이 기사를 다시 보니 내가 흥미롭게도 윤석화의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시대구분(時代區分)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때 기사를 보고 “세상에, 윤석화가 벌써 환갑이라니! 세월도 빠르지”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솔직히 나는 처음에 이 작품을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리아 칼라스라니. 그 철혈의 여인이라니. 무대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고개를 뻣뻣이 세우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작품을 보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래 리뷰 기사는 월간 ‘객석’ 2016년 4월호에 실렸다. 기사 중 ‘한때 좌절에 빠졌다’는 표현은 1997년 ‘명성황후’와 관련된 일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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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마스터 클래스’
‘대체 불가능 배우’의 귀환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마스터 클래스’(테런스 맥널리 작, 임영웅 연출)의 첫 장면. 피아노와 반주자만 보이는 심플하고 한적한 무대 위, 돌연 뒷벽에 붙은 문이 열리더니 자신만만한 자태의 한 여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박수는 안 치셔도 됩니다. 수업을 하러 왔으니까요!” 정확한 한국어 발성이 객석에 명징하게 내리꽂힌 바로 그 순간, 그 넓은 무대가 그녀의 존재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실로 경이적이고 불가해한 카리스마였다.
한국 연극사는 2016년 3월 10일 오후 8시의 이 대목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배우 윤석화가 반주자 역 구자범과 함께 무대에 나타난 이 장면은, 2010년 1월 24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의 ‘베니스의 상인’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연극 무대에서 다른 배우와 함께 공연(共演)을 위해 선 모습이었다. 윌가 한동안 그녀를 잊었거나 혹은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의심했던 사람이라면 이 6년 만의 장면이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그녀가 마침내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연기 인생 40년의 시점에서 윤석화가 택한 작품은 ‘신의 아그네스’나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닌 ‘마스터 클래스’였다. 한때 좌절에 빠졌던 1998년 스스로를 구원해 줬으며 최연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가 되게 한 작품이지만 그 이후 공연된 적이 없는 작품. 전설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은퇴한 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기성 가수를 상대로 열었던 특별 수업에서 펼쳐지는 쉽지 않은 내용의 작품이다. 극 중 마리아 칼라스는 폭풍 같은 정열의 화신이다.
“극장에서의 성공은 완전한 집중을 요합니다. 100%의 세밀함, 그 이상의 치밀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왜 편지를 들고 있는 척만 하죠? 난 진실을 원해요.” “예술가란 하늘에 올라 별을 따기 위해 간혹 쓰레기 바닥을 기어다니기도 해야 하죠.”
무대에 제대로 서기 위해선 지독하게 치열해야 한다는 이 대사들은 ‘칼라스인 척’하는 게 아니라 ‘칼라스가 돼버린’ 윤석화의 연기를 타고 생명력을 얻는다.
칼라스의 수업이 순식간에 모노드라마로 바뀌는 1막과 2막 후반부에서 연기는 폭포수를 쏟아붓는 것처럼 절정에 달한다. 아리아가 시작되자, 조명에 의해 비현실적으로 강조된 그림자 아래 선 그녀는 오만함 뒤에 감춰진 처절한 외로움과 비애를 토로하며 몸부림친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쳤어요, 내 모든 것을요…” 18년 전 무대에서 그녀가 40대 초반의 활활 타는 에너지를 보였다면, 환갑이 다 된 지금은 거기에 세월을 겪은 노련한 원숙미가 더해졌다.
여기서 사람들은 깨닫는다. 어디까지가 칼라스이고 어디서부터 윤석화인가? 정열, 조소, 질투, 비탄, 눈물, 의지, 환희가 오페라처럼 교차하고 중첩되는 이 ‘천(千)의 얼굴’은 칼라스이자 윤석화이고, 윤석화이자 칼라스였다. 마침내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우린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없는 세상에 비해 훨씬 풍요롭고 현명한 세상으로 말입니다.” 공연이 끝나자 꽃다발을 든 머리 희끗희끗한 관객들이 분장실 입구에 줄을 섰다. 영욕의 춘하추동 40년, 그리고 이제 춘(春)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 ‘대체 불가능 배우’는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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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클래스’ 공연 다음 달인 2016년 3월, 윤석화는 오랜만에 다른 명배우들과 협업을 하게 됐다.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만 출연하는 대작 ‘햄릿’이었다.
그리고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연습실에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공연하는 ‘드림팀’의 연습을 취재했다. 윤석화가 10대 소녀 오필리어 역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걸 보고 그녀의 실제 나이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는데 다른 기자들도 함께 웃었다. 그런데 윤석화는 왜 웃는지 당황스럽다고 했고, 레어티즈 역의 전무송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잠시 웃었던 것이 두고두고 미안했는데, 끝내 처음 웃은 사람이 나라는 것은 숨겼다. 다시 한번 미안해진다. 물론 ‘누구인가? 누가 지금 웃음소리를 내었어?’라고 물은 적은 없다.
이 연극의 리뷰 기사를 이틀 동안 연달아 두 번 썼다. ‘사람들이 도대체 언제 적 유인촌이고 언제 적 윤석화냐고 할까? 와서 보고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라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햄릿’은 공연 사흘 만에 국립극장 특설 무대의 27회 공연 티켓 1만6200장이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제 윤석화는 완벽하게 ‘배우’로 돌아왔다. 그리고 ‘햄릿’이 끝나자마자 같은 국립극장에서 ‘마스터 클래스’의 재공연을 기획했다. 눈코 뜰 새 없었다. 이번엔 극중 테너 가수 역으로 뮤지컬 배우 양준모가 출연했다. 나는 재공연을 계기로 양준모를 인터뷰해 기사로 실었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나기 직전, 윤석화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갈비뼈 6대가 부러졌다. 양준모 인터뷰가 신문에 나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아, 이럴 수가… 시련이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공연은 당연히 취소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휠체어를 타고 공연을 한다는 얘기였다. 이게 무슨 소리!
그리고 정말로 공연을 강행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숱한 공연을 봤지만 객석에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인내하며 무대를 지켜본 공연은 없었다. 배우의 실제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신음을 내뱉듯 혼자서 연신 중얼거렸다.
“연극이 뭐기에, 연극이, 아아 도대체 그깟 연극이 다 뭐라고, 그깟 무대가 다 뭐라고...”
공연이 끝난 뒤 박정자, 손숙, 성병숙이 들어와 윤석화를 위로하면서 분장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한 십 대 소녀가 방 안으로 들어와 감격에 겨워 펑펑 우는 걸 보고 윤석화가 안아 줬다. 그걸 또 사진을 찍어서 신문에 같이 실었다. 아는 사람인가 했더니 그냥 관객이라고 했다. 코로나 이전의 연극계엔 이런 소소한 낭만도 있었다. 지금은 분장실에 관계자 아닌 사람이 들어가는 일이 금기처럼 돼 버렸다.
사실 이것은 마음먹고 크게 쓴 기사였다. ‘마스터 클래스’의 재공연은 당초 이렇게 대서특필할 계획이 없었다. ‘잊힌 배우인 줄 알았던 윤석화가 이렇게 감동을 줄 줄은 몰랐다’며 기사를 읽고 감탄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결과적으로 이 기사는 내가 신문에 쓴 마지막 윤석화 기사였다. 기사가 난 지 닷새 뒤에 윤석화는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기사 자체가 감동이라는 많은 인사를 분에 넘치게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감동은 기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취재원인 그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에쿠우스’의 대사처럼 과학자나 기자 같은 제3자는 열정을 없앨 수는 있어도 창조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열정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배우뿐인 것 같다.
무대 밖에서 만나는 윤석화는 마치 누나처럼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종종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한번은 1990년대에 대학로에서 유명했던 여배우가 오랜만에 무대 복귀를 해서 반가운 마음에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는 “제가 그때 ‘제2의 윤석화’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그걸 본 윤석화는 사석에서 ‘흥칫뿡’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제2의 윤석화 좋아하시네”라고 했다. 그리고 비화를 들려줬는데 확인이 안 될뿐더러 확인된다 해도 쓰기 어려운 내밀한 얘기였다. 언젠가는 “연극계에서 내가 내 ‘후계자’로 생각하는 배우들이 몇 명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배해선이었다.
2016년 말에 나는 만 3년 동안의 공연 담당 기자를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가게 됐다. 그 3년 동안에 윤석화가 배우로 복귀한 것을 생각하면 기쁜 마음이 들었다.
2021년 산울림소극장에서 윤석화는 ‘자화상’ 공연을 했다. ‘하나를 위한 이중주’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 세 연극의 하이라이트 공연으로 일종의 ‘아카이브 공연’이라고 했다. 이때는 이미 코로나 시국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서 윤석화를 아주 반갑게 만났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23년 8월에야 그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자를 보냈더니 ‘열심히 치료에 전념하고 있어요 ㅎㅎ 감사해요’란 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마지막 문자가 됐다.
윤석화의 빈소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란 제목의 팸플릿이 놓여 있었고 거기 적힌 ‘고별 인사를 대신하며…’란 제목의 글은 ‘마스터 클래스’의 대사였다. “하지만 우린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없던 세상에 비해 훨씬 풍요롭고 현명한 세상으로 말입니다.”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는 동안 입술을 깨물며 숨죽여 말했다.
감사했어요 누나.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주셔서요.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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