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수습 임무를 받고 부임한 박진경(맨 오른쪽) 9연대장이 참모들과 함께 촬영했다./ 조선일보 DB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5일 1948년 제주 4·3 사건 초기에 수습을 맡았던 박진경(1920~1948) 대령의 국가 유공자 지정 취소 검토를 지시한 것에 대해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부임 한 달여 만에 남로당의 사주로 암살당한 박 대령을 ‘학살자’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시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 세력이 박 대령 암살에 성공한 후 그를 악마화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무현 정부 때 나온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와 나종삼(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박철균(예비역 육군 준장, 박 대령의 손자) 공저 ‘제주 4·3 사건과 박진경 대령’, 제민일보 취재반의 ‘4·3은 말한다’ 등의 자료를 근거로, 박진경 대령과 관련한 쟁점 다섯 가지에 대해 짚어 본다.

①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희생시켰나?

근거 없는 말이다. 박진경 대령은 4·3 사건 수습 임무를 맡아 제주도에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9연대장으로 부임했다가 숙소에서 남로당 세포 조직인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집무실 한 켠에 마련된 야전 침대에서 취침 중 총에 맞았다. 그가 9연대장으로 활동한 기간은 1948년 5월 6일부터 6월 18일까지 43일에 불과했다. 이 기간 경비대가 남로당 무장대를 사살한 인원은 14명뿐이었다. 경찰과 합동 토벌을 벌인 작전까지 더해도 25명이었다(‘4·3은 말한다’). 이 기간 비무장 민간인 살상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4·3 당시 민간인 피해가 아예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암살범 중 한 명인 손순호는 법정에서 자신들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려고 ‘5월 1일 오라리에서 남녀노소의 시체를 봤다’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박 대령 부임 전의 일이었다. 4·3 당시 민간인 피해는 1948년 10월 전남 여수 14연대 반란 이후 군의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된 이후 주로 발생했다.

연구자들은 부임 후 부대 정비를 하고 작전 임무를 수행하기도 빠듯했을 그 기간에 ‘양민 학살’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고 본다. 당시는 미 군정 시절이었기 때문에 경비대의 작전은 미군의 로스웰 브라운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박 대령이 브라운 대령 모르게 양민을 상대로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② 박 대령이 ‘30만 도민을 희생해도 좋다’고 말했다는데?

박 대령이 ‘폭동 진압을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했다는 ‘30만 희생설’은 암살범 중 한 명인 손순호 하사의 법정 진술에서 나온 말이다. 손 하사는 위생병 신분으로 암살에 가담했다(자유신문 1948년 7월 13일 자). 연대장인 박 대령이 이와 같은 작전 방침을 세웠고, 이를 위생병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대대장·소대장 등 지휘관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박 대령과 같이 근무한 채명신, 이세호, 김종면, 류근창 등 부하들의 증언 어디에서도 ‘30만 도민 희생’ 발언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암살 주범인 문상길 중위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김달삼(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30만 도민을 위해서 박 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말했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14일 자) 연구자들은 이것을 손순호가 박 대령이 한 말로 바꿔 진술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③‘토벌 지휘자’로서 제주도민을 공격한 게 아닌가?

박 대령이 부임한 시기는 4·3 발생 초기였다. 그는 도민을 탄압하기 위해 부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남로당 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방해하려고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선거 방해를 위해 민간인들을 강제로 산으로 데려갔다. 당시 소대장이었던 채명신 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은 “박 대령은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고 증언했다.

④ 미군 정보 보고서에 ‘5000여 명이 체포됐다’고 나온다는데?

정확히는 1948년 7월 2일 주한 미 육군사령부 민간인 고문관 제이콥스의 보고서 ‘제주도 소요 사태’로, 박진경 대령 재임 기간 경찰과 경비대에 체포된 주민이 3000여 명이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대부분 군·경·미군 합동 심문팀에 의해 조사받고 석방됐다. 유격 부대에 대한 정보 획득과 대공 용의점 등을 파악하기 위한 합동 심문은 당시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절차였다. 대부분 5·10 선거를 보이콧하려는 남로당에 의해 강제로 입산했다가 미처 하산하지 못한 주민들이었다.

⑤ 암살범들은 ‘박진경 대령으로부터 도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거사한 것’이라고 했는데?

박진경 대령이 부임한 지 불과 나흘 뒤인 5월 10일, 남로당 측의 ‘제주도 인민 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처음부터 박진경 대령의 암살을 획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