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은 ‘여수·순천 10·19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포들이 주도한 무장 반란으로 시작됐다.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이 내려지자 지창수 선임하사 등 남로당 반란 세력은 ‘동족 살상하는 제주도 출병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의 구호를 내걸고 폭동을 일으켰다.

1948년 10월 여순 사건을 진압한 뒤, 여수 시내에 진출한 국군. 거리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군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게티이미지코리아

14연대 내 남로당 세력은 무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반란군에 맞선 장교 21명을 살해했다. 여수 시내로 진입한 뒤엔 경찰서 등 관공서를 공격했고, ‘미군 철퇴’ ‘인민공화국 수립 만세’ 등의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는 결정서에서 보듯 여순사건 주동자들의 목적은 대한민국 체제 전복에 있었다. 지역의 좌익 세력이 호응하면서 반란은 확대됐다. 당시 정부 발표로는 여수에서만 민·관 1200명이 반란 세력에 의해 살해 당했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끝까지 맞섰던 독립운동가이자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쳤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처럼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국내에서 여순사건을 반란으로 본 것은 이승만 정부뿐이 아니었다. 정부 수립을 전후해 이승만과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김구는 10월 31일 발표된 담화문에서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 테러 행동”이라며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허무한 유언(流言)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 정부도 여순 사건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봤다. 남로당 세력의 반란 초기 잔혹 행위가 반란 실패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953년 박헌영 등 남로당 세력이 북한에서 숙청될 때는 여순사건을 ‘박헌영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국군 내 좌파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조작했다. 여순 사건에 대한 북한의 현재 공식 입장은 ‘이승만 괴뢰 도당을 반대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인민의 애국 투쟁’이며 ‘미제와 그 주구들의 야만적인 탄압, 박헌영 간첩 도당의 와해 책동 때문에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