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미국 하와이 한인여학원 교사·학생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한 교장 이승만(맨 뒷줄 가운데). /올림피아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 앤드 비글로 하우스 뮤지엄

1918년 10월 30일, 미국 하와이 준주(準州·주에 준하는 자치 체제를 갖춘 행정구역) 제1순회 소년법원의 윌리엄 힌(Heen) 판사는 제4088호 명령문을 작성했다. 정○○라는 13세 한인 소년이 비행 아동임을 확인했는데, 공익과 해당 아동의 복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년을 한 사람의 보호와 감독하에 위탁한다는 명령이었다. 그 인물은 ‘Dr. Syngman Rhee’. ‘이승만 박사’였다.

◇하와이의 ‘교육가’ 이승만

1912년 3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두 번째 미국행을 택한 이승만은 1913년 2월 하와이로 이주했다.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삼아 교육, 언론·출판, 한인 교회 건립, 국제회의 참여 활동 등에 나섰다. 그중 가장 돋보인 것은 교육 활동이었다. 미국 감리교가 운영하던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한인중앙학교’로 개편한 뒤 학생 수를 36명에서 120명으로 늘릴 정도로 크게 발전시켰다.

하와이 신문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는 1913년 9월 28일 자에서 ‘한국의 젊은 혁명가가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가 된 뒤 호놀룰루의 교육가로 변모했다’며 크게 보도하고 이승만을 ‘위대한 작은 박사(the great little doctor)’라고 표현했다.

1916년 이승만은 하와이에 ‘한인여학원’을 설립했다. 독자적 교육기관 운영을 통해 독립 사상이 발전하고 자치 능력이 배양되면 이것이 곧 독립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1918년에는 한인여학원을 남녀공학 ‘한인기독학원’으로 발전시켰다. 이승만의 교육 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그를 신뢰하는 한인 동포들의 후원과 지지였다.

1918년 10월 30일 한인 비행 아동의 보호와 지도를 이승만에게 위탁한 하와이 법원 명령문.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1913년 9월 28일 교육가 이승만을 크게 보도한 하와이 신문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 기사.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하와이 법원은 이승만을 신뢰했다

하와이 소년법원의 이 문서는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소장한 것으로,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미공개 이승만 문서 정리·분류 및 DB화 사업’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됐다. 하와이 법원이 법적 책임을 부여할 정도로 ‘교육가 이승만’을 신뢰했고, 이승만이 학교 밖 한인 아동의 지도까지 맡았다는 내용이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은 “기존 하와이 시절 이승만 관련 사료나 하와이 언론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문서”라고 했다.

법원 명령의 근거가 된 하와이 준주 개정법 제123장에 따르면 14세 미만 아동은 재판 후 감옥에 구금될 수 없었고, 보호관찰자 또는 그에 상응하는 인사에게 보호와 지도를 받도록 위탁될 수 있었다. 위탁자는 판사가 보증하는 인물이었으며 이는 위탁자에 대한 하와이 법원의 신뢰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국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국적과 신분이 불안정했던 이승만이 그 약점을 덮고도 남을 만큼 교육가로서 명망과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승만에게 소년의 위탁 명령을 내린 힌 판사는 1917년 하와이 준주 제1순회 법원의 판사로 부임했는데, 당시 나이 34세로 최연소 판사였다. 임명자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었고, 힌은 정치적으로 윌슨과 같은 성향의 법률가였다. 프린스턴대 박사 이승만이 윌슨의 제자라는 사실은 당시 하와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힌 판사가 이승만을 신뢰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희 소장은 “이승만은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하와이를 떠났는데, 개인적으로 그 아동을 직접 돌볼 처지는 아니었더라도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기독학원에서 보호와 지도를 받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