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6월 미 의회도서관에 ‘독립정신’을 헌정한 이승만은 7월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일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배표와 기차표를 사고 대부분이 책인 이삿짐을 쌀 무렵인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이승만은 9월 3일 뉴욕항을 떠나 유럽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만주로 갔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 한반도로 들어올 때 일본 관리에게 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받으며 망국의 설움을 새삼 느꼈다.
고국을 떠난 지 6년 가까이 지난 10월 10일, 이승만은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 YMCA에서 그는 성경과 만국공법을 가르쳤다. 당시 최고 학력의 지식인인 이승만의 강연을 듣기 위해 청년들이 운집했다. 그들 중엔 임병직(훗날 외무부 장관), 정구영(훗날 공화당 의장), 허정(훗날 과도정부 수반) 등도 있었다. 1911년엔 두 차례 전국을 다니면서 교회와 학교를 방문했다. 당시 여정을 모두 합치면 3700㎞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해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한 이승만은 37번째 생일인 1912년 3월 26일 또다시 집을 나서 두 번째 미국행을 택했다. 그야말로 기약 없는 망명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