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이승만·김구와 함께 우익의 3대 정치인으로 꼽혔으며, 좌우 합작 운동에 나섰으나 6·25 때 납북 직후 비극적인 병사(病死)로 생을 마감한 인물. 우리가 아는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의 대략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중견 현대사학자인 정병준(60)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그것은 거대한 생애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라며 “김규식이 아니었다면 3·1 운동이 그렇게 전국적인 대폭발을 일으킨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지난주 3권 분량의 연구서 ‘김규식과 그의 시대’(돌베개)를 출간했다. 1870여 쪽, 집필에 12년이 걸린 대작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사진 한 장과 조각난 글자의 흔적을 찾아 세계를 떠돌고, 역사의 편린과 모자이크를 맞추기 위해 온종일 촬영하고 복사하고 스캐닝하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는’ 작업을 거친 노작이다. 중국·일본·미국·러시아 등 곳곳에 흩어진 자료를 모아 김규식은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했다.
김규식은 일생 전체가 ‘비극적이면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고아 소년 존’이라 불렸다. 부친 김용원은 고종의 밀사로 러시아에 다녀왔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를 갔고, 어머니는 곧 별세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어린 소년을 선교사 언더우드가 구출해 돌봤다. 탁월한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버지니아주 로노크대를 졸업하고 1904년 귀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프린스턴대 석사과정엔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책은 2권 전체를 3·1 운동 전후 김규식의 활동에 할애했다. 1차 대전 종전 직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단기필마 ‘한국 대표’로서 활동을 벌였다. ‘1인 외교’로서 연합국 측에 한국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으며 한국통신국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정 교수는 그의 활동이 3·1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한다. “1910년 이후 조선인은 ‘우리는 안 된다’는 비관적 정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된 민족자결주의가 세계에 확산하면 약소 민족도 독립할 수 있게 됐다고 여겨졌는데, 그곳에 우리 대표가 참여했다는 소식으로 크게 고무된 것이죠.” 김규식의 활동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상하이·도쿄의 민족운동 세력을 흔들었고 국내 각 종교 지도자들을 움직였다. 3·1 운동은 그 결과였다.
당대의 엘리트 인사였던 김규식은 외교 독립 노선을 걸었다. 이승만은 가지 못했던 소련 국경도 넘었다. 사상·이념·정파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통일전선적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40년대 ‘임시정부 부주석’ 지위에 실권이 따르지 못했듯 종종 중심에서 배제됐지만, 투쟁의 길에선 이탈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를 다룰 4권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김규식이 해방 정국에서 벌인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 정 교수는 “결국 고도의 정치 활동이었던 셈”이라며 말을 아꼈다. 김규식이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었으나, 김일성을 향해 ‘공산 독재와 사유재산 금지를 포기해야 협상을 할 수 있다’며 핵심을 찌르는 요구를 했다. 만약 6·25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 교수는 “김규식은 평화통일 운동을 내세우며 현실 정치에 참여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