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광복 당시의 ‘중학생’은 지금의 중고등학생 위상과는 크게 달랐다. 중학교만 다녀도 지식인으로 대우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중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인 현재와는 무척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왜 그랬을까?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의 15세 이상 인구 중 중학교 졸업자의 비율은 1.62%에 불과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자가 11.77%였으니 국졸자 중 13.76%만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학교 졸업자는 0.16%, 대졸자는 0.05%였다. 우리나라의 대졸자 비율이 2023년 25~34세 기준 69.7%인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1945년에는 제4차 조선교육령(1943)으로 인해 중학교(1938년 이전엔 고등보통학교·고보) 과정은 5년에서 4년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던 것은 일제의 교육 차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고급 인력을 많이 양성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에는 고등학교가 있었지만 조선에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 대학에 유학을 가려는 사람은 조선에서 전문학교를 나오거나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일본 대학에 가서도 본과가 아니라 전문부나 예과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1945년 이전엔 중학생이 몇 명 되지도 않았던 데다가, 중학교만 나와도 사회에서 상당한 지식인으로 대접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1945년 문맹률이 78%에 달하던 상황에서 글을 읽을 줄 알고 지식과 교양을 갖춘 중학생은 인재로 대우받기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중학생(고보생)의 지적 수준이나 사회적 역량도 뛰어났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광주고보 학생들은 조직적 학생 운동을 이끌었다. 일제 치하에서 학교마다 독서회를 조직하고 시위를 주도해 사회 각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