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정 자료의 구체성에 의거해 볼 때,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 합작 운동’은 한국 내부의 자생적 동력에 기반한 정치 운동이라기보다는, 미 군정에 의해 관리되고 주도된 정치 협상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반면 미 군정과 이승만의 갈등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 군정이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을 옹호하고 여운형 등의 세력을 탄압했다’는 종래의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가 나왔다. 문유미 미국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의 국제학술회의 발표문 ‘제국의 군인과 운동가적 정치인’이다. 문 교수는 4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막한 동북아역사재단·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공동 주최 국제학술회의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시각’에서 이를 발표했다.
문 교수는 “당시 미국 측 자료는 존 하지 군정 사령관이 남한 정치 세력의 좌우 합작을 이용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려 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 때문에 미 군정 지도자들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한국의 미래를 소련과의 협상에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며 좌우 합작 정책을 펼치는 미 군정을 비판했다. 문 교수는 이승만이 당시의 정치적 고립 상태를 맞아 노련한 독립운동 투쟁가로서 자신의 좌표를 설정했다고 평가했다. 선거, 대의제, 자결주의와 같은 민주주의적 원칙들을 환기함으로써 좌우 합작의 틀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미 군정하에서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제안’을 발표한 오영섭 독립기념관 이사는 “1946년 제기된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은 남한에서만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북한 지역까지 망라한 거족적이며 단계적인 남북통일 방안이었다”고 했다. 또 “소련 군정에 의해 소비에트화가 진행되던 당시 북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실현 가능한 국가 건설 방안이었다”고 지적했다.
5일 ‘제헌국회 시기 한국의 정치체제’를 발표하는 안도경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1948년 5·10 선거는 2차대전 이후 인민위원회 노선과 자유선거 노선이라는 국가 건설·재건의 두 가지 노선 중 후자를 선택한 사건이었다”며 “제헌헌법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새로 제정된 헌법 가운데 유일하게 민주성과 자주성의 절차적 기준을 충족하며 제정됐다”고 분석한다. ‘제헌국회의 이념적 풍경’을 발표하는 고중용(서울대 박사 수료)씨는 “제헌국회는 체제의 성립과 유지, 안보와 치안의 확보, 민생과 인권 등의 주요 과제에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