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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38선을 넘는 백범 김구(가운데)와 그의 비서 선우진(왼쪽). 오른쪽은 백범의 아들 김신.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2월 1일 극장 개봉합니다. 어렵게 영화관을 확보하긴 했지만, 영화를 만든 김덕영 감독은 “상영관을 많이 배정받지는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습니다.

오랫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공(功)이 과(過)에 가려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6·25라는 비극적인 전쟁을 계기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주한미군 주둔과 한국군의 증강, 8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이끌어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외국군을 주둔케 해 남한을 미제(美帝)가 점유하는 반(半)식민지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인식을 갖게 했습니다. 돌이켜보자면 오래 전 대학 시절의 저 역시 이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랬습니까? 미제 식민지 운운은 이제는 우스갯소리처럼 보입니다. 대한민국은 그 일을 기점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방면에서 발전과 번영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상 유례 없는, 전사자 100명 이상의 전투가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70년의 장기 평화를 누리게 됐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앞잡이? 그 전까지 미국은 한반도에 별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과연 누구의 업적일까요? 이승만이었습니다.

1950년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교육에 예산에 20%를 투자했습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고 독도를 되찾았습니다. 신생국 대한민국의 첫 선거부터 남녀평등을 실현했습니다.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해 원자력 연구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모두 이승만이 한 일입니다.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반대와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50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국민들을 설득하면서 말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1945년 해방 이후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게시한 한반도 야간 이미지. '이승만의 선택'이 70여년이 지난 뒤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X

이승만이 저지른 모든 과오를 덮으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 80년의 역사는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음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주도 아니었고 자본가도 아니었으며 사사건건 미국과 충돌하며 좌·우익 여러 세력들의 견제를 받던 빈털터리 정객이었습니다. 독재자의 오명을 쓰고 하와이로 망명했을 때도 역시 빈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이승만이 뭘 했던 것인지’ 깨닫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건국전쟁’은 그런 이승만이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다른 정치인 한 사람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한국독립당 지도자 김구(1876~1949)입니다. 그리고 ‘김구·유어만 회담’의 내용을 영화에서 비중 있게 소개합니다.

사실 영화를 미리 본 저는 그 장면에서 잠시 ‘이승만 영화에서 과연 이 얘기까지 꺼낼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무척 민감한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김구의 아킬레스건’ 이라고 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하지만 ‘유어만 회담’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짚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1948년 초, 한반도의 총선거를 감독해 신생 정부 수립을 이루려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38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소련이 이들의 입북을 거절했기 때문이죠. 2월 10일 김구는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발표하고 통일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김구는 4월 19일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고,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38선 남북에서 외국군이 철수한 뒤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5·10 선거를 반대하는 데 김일성과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을 천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회의장으로 향해 가는 김일성(왼쪽)과 김구.

그런데 이와 같은 ‘남북협상’ 도중 김일성과 회담한 김구는 4월 30일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함께 발표합니다.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군한다 하더라도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불과 2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김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요.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존재가 알려진 문서 하나가 있습니다. 이승만의 사저였던 이화장에 보관돼 있던 이 문서는 현재 연세대 이승만연구소로 옮겨졌습니다. A4용지 두 장 분량인 이 짧은 영문(英文) 문서의 내용은 무척 충격적이었습니다.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는 “이걸 봤을 때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것은 ‘김구·유어만 대화 비망록’입니다.

유어만(劉馭萬·1897~1966)은 중화민국의 외교관으로 1948년 당시 주한 중국 공사로서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현행 중국인 표기 원칙상 ‘류위완’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유어만’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편의상 이렇게 쓰겠습니다.

김구와 유어만의 회담에 대해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의 한 장면.

김구가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지 두 달 뒤인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유어만은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밀명을 받았던 유어만은 이 자리에서 김구를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민감한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밀명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는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의 전쟁이 치열했던 국공 내전의 시기였습니다. 장제스는 김구가 이승만과 협력해 정부에 참여해서 확고한 반공(反共) 체제를 수립해 북한을 견제해 주기를 바랐고, 유어만을 통해 김구에게 ‘정부에 들어가 부통령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구는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내가 정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한민당과의 갈등이 일어날 것이므로 차라리 바깥에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어만은 ‘그럴수록 당신이 정부에 들어가 한민당을 견제하는 임정 출신 신익희(초대 국회의장), 이범석(초대 국무총리), 지청천(초대 무임소장관) 등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구가 ‘반미주의자로 비방 당한 내가 정부에 들어가면 국가 건설에 필요한 미국의 원조마저 막힐 수 있다’고 하자 유어만은 ‘이승만 박사도 한때 그런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며 김구를 설득하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문제의 그 발언이 등장합니다. 김구는 유어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문서 원문인 영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학계의 기존 번역을 토대로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가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동기 중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지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 받을 새도 없이 손쉽게 남한을 급습하는 일에 그것(북한군)을 투입시킬 것이고, 지금 잠시 여기(남한)에 어떤 정부가 서고 있지만 (곧 소련에 의한)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문서 원본에 영문으로 적힌 내용) “One of the motives for going to the Leaders Conference was to see the actual things happening in North Korea. Even if the Communists stop expanding the Korean Red Army for three years to come, all the efforts in South Korea will hardly be able to build up an army to the present strength of the red army. The Russians will easily set it on its southward swoop without incurring the blame, for the moment a government is set up here, the People’s Republic will be proclaimed.”

1948년 7월 11일 '김구·유어만 대화 비망록'의 일부. 아래 'V' 표시된 부분이 김구의 해당 발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길까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가능합니다.

①긍정적 해석: 남북한의 군사력 현실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자신이 평화적 통일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김구는 북한의 군사력이 짧은 시간 동안 대단히 신장돼 남한과 비교할 수 없다게 됐다는 정세 판단을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소련이 북한군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단시간에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것은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假定)이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의 평화적 협상과 통일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로 자신의 역할이 중요한데 자신마저 남한 정부에 들어가게 되면 누가 북한과 대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평양에서 김일성과 함께 4·30 성명을 발표하며 ‘외국군이 철수하더라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전쟁을 도발하지 않겠다는 뜻을 북한 측으로부터 확언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유어만은 이 문서를 본국에 보고하면서 복사본을 이승만 측에 건넸는데, 김구가 이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북한의 군사력에 대해 이승만 정부에 간접적으로 경고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②부정적 해석: 북한군이 남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전쟁이 없다’는 위선적 발언을 했고, 대한민국이 멸망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이 멀지 않은 시기에 남한에 군사적 공격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군사력 차이 때문에 도저히 남한은 버틸 수 없으리라고 예견했으며, 이것을 유어만과의 비밀회담에서 털어놓은 것입니다. 그런 판단을 한 사람이 겉으로는 남북협상 당시 북한을 떠나기 전에 발표한 4·30 공동성명에서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완벽한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김구가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곧 멸망할 나라에 왜 참여하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음이 드러났다는 해석이 됩니다. 대세(大勢)는 북한 주도의 통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굳이 이승만과 손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것은 과연 무슨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수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자였음이 드러난다. 북한의 군사적 우위에 투항하는 기회주의적 행태까지 보이고 있다.”

…진실은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요.

저는 심정적으로는 아직도, 여전히, 1번을 믿고 싶습니다. 김구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일제와 싸웠던 민족 지도자였고, 해방 후에는 반탁 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의 동상이 모두 철거된 뒤 남산에 세워졌던 동상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백범일지’와 ‘나의 소원’을 읽고 감동했던 수 많은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늘 팩트에 부합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한 그의 행보를 보면 북한에 속고 이용당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저들에게 속고, 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선동에 이용당하며, 때로는 일부러 속아 주는 듯했던 일이 왠지 낯설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길게 놓고 보면, 남한의 위정자들은 그렇게 속았으면서도 속고 또 속는 일을 계속 반복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附記: 오해하시는 분이 있어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유어만 회담에서 드러난 김구의 발언에 대해 옹호하고자 쓴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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