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남긴 최후의 도서는 ‘대동여지도’가 아니었다. 전국 팔도의 지리와 연혁을 상세히 기록한 지리서 ‘대동지지(大東地志)’였다. 이 저작이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역자는 이상태(80) 한국영토학회장을 비롯해 고혜령·김용곤·이영춘·김현영·박한남·고성훈·류주희 등 이 회장과 과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함께 근무했던 연구자들이다.
번역본이 모두 8권 217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대동지지’(경인문화사)는 김정호가 평생 연구하고 정리했던 지리학의 완결본이라 할 만하다. 이상태 회장은 “김정호는 좌도우서(左圖右書)라 할 만큼 지도와 그 바탕이 되는 지리서를 함께 만들었다”고 했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같은 지도를 만드는 바탕이 된 것이 바로 그 자신이 저술한 ‘여도비지’ ‘동여도지’ 같은 지리서였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뒤에 저술한 마지막 저서가 바로 ‘대동지지’였다. 평안도 부분의 일부는 다른 사람이 보충한 미완의 저작이다.
이 회장은 “김정호는 가만히 있었던 사람도, 전국을 돌아다닌 사람도 아니었다”고 했다. “속설처럼 백두산을 몇 번 올랐다는 얘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얘기지만, 지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끝없이 공부하고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전국 334개 군현의 정보를 기록한 ‘대동지지’는 19세기 중반 조선 인문지리학의 결정판이라 할 만한데, 특히 장시(場市)를 샅샅이 기록해 상업의 발달을 반영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서양의 정보가 담긴 부분도 나오는데, 충청도 홍주목(지금의 홍성군) 항목에서는 1832년 영국 상선이 도착한 일을 언급하며 ‘그 나라의 서울은 란돈(蘭墩·런던)이며 둘레는 75리’라는 등의 정보를 기록했다. 이 회장은 “전국 어디에 사는 사람이라도 자기 고향의 이력을 알기 위해선 ‘대동지지’의 해당 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동지지’를 번역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1866년 정도로 알려졌던 김정호의 몰년(沒年)에 변동이 일어나게 됐다. 경기도 삭녕군 편의 주석에서 1868년(고종 5년)에 일어난 역모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최소한 1868년까지 김정호는 살아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세간에 알려졌던 것처럼 ‘흥선대원군에게 대동여지도를 바쳤으나 첩자로 의심받아 옥에 갇힌 뒤 죽었다’는 얘기는 모두 거짓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