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호 기자

“3차원 가상세계인 메타버스의 시대에 신화(神話)는 새롭게 각광받게 됐습니다.” 정재서(70·사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말했다. 현실과 상상이 공존하고 ‘가상’을 마치 ‘실재’인 것처럼 만든다는 점에서 메타버스와 신화는 서로 통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제 인간이 AI(인공지능)에 맞설 수 있는 창의적인 힘이 상상력이고, 상상력에 의해 이미지와 스토리가 생성됩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의 원천은 바로 신화입니다.”

현재 영산대 석좌교수로 있는 정 교수는 동양신화의 고전인 ‘산해경(山海經)’을 국내 처음으로 번역했던 중문학자이자 신화학자다. 그는 새 저서 ‘사라진 신들의 귀환’(문학동네)에서 한때 낡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신화의 복권(復權)을 역설한다. 신화는 인류 삶의 원형이자 집단 무의식이며, 멀리 떠나왔던 사람이 자연스레 고향을 찾듯 이제 사람들은 신화를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엔 어른들이 ‘옛날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해진다’ ‘극장 들락거리면 깡패 된다’고 말하곤 했죠. 이성주의 시대에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이야기’를 도외시했던 겁니다. 그런데 주입식 학교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창의적인 사람이 됐나요?”

다시 신화를 읽는 어른들은 집을 떠나 모험을 거친 뒤 돌아오는 ‘출발-모험-귀환’의 구조에서 인생을 함축한 은유가 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괴물이나 요마와 싸우는 이야기는 ‘내 마음속의 부적절한 생각’을 극복하고 한 단계 성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특히 동양신화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대립이 아니라 친연 관계라는 생태주의적 의식이 있다”고 말했다. 머리가 소이고 몸이 사람인 반인반수(半人半獸)는 그리스 신화에선 괴물 미노타우로스로 등장하지만, 동양신화에선 인간에게 농업과 의약을 가르쳐 준 현신(賢神) 신농이 된다. ‘산해경’의 변방 사람들은 이상하고 괴짜 같으면서도 공존해야 할 존재들로 나온다. 인간중심주의와 순혈주의를 버리고 자연과 이방인을 끌어안는 포용성을 보인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신화가 현대 사회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며 영화 ‘아바타’ 시리즈를 예로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활론(物活論), 생명의 연대성, 대모신(大母神) 신앙 같은 신화적 상징에 기초했기 때문에 신화를 알아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죠. 물이 배경인 ‘아바타2′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상선약수·上善若水)’고 했던 노자(老子) 사상과도 통합니다.” 최근 할리우드가 조금씩 탈(脫)서구 중심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핵심에 신화적 상상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