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금속활자는 책을 ‘빨리’ 만들기 위한 게 아니라 ‘잘’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5세기 중반의 최고(最古) 한글 금속활자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나온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활자들을 조사해 발표한 사람이 이재정(59) 학예연구관이었다. 20년 넘게 박물관의 활자들을 연구해 온 그가 최근 교양서 ‘활자본색’(책과함께)을 냈다. 고려 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조선시대 금속활자에 대한 책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 활자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세요? 82만점입니다. 그중에서 금속활자는 50만점이 넘고요.” 세계적으로 이렇게 실물 활자가 많이 남아 있는 나라는 없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조선 전기와 후기 수십 차례에 걸쳐 수백만자의 금속활자가 제작됐다.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을까. 이 연구관은 “금속활자는 ‘문자를 새긴 보물’이었다”고 말했다. 귀중한 서적의 오류 없는 정본(定本), 즉 얼티밋 에디션(ultimate edition)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그것에 담겨 있었다. 오자가 발생할 때 글자 하나씩 교체할 수 있는 실용성도 있었지만, 활자 자체가 정교하고 미려한 예술품이었으며 문화 수준과 경제력의 척도였다는 것이다. 활자를 많이 주조한 왕은 세종(경자자·갑인자·병진자)과 정조(정유자·재주한구자·정리자)였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서양의 구텐베르크 활자처럼 정보의 확산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며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이 연구관은 “처음부터 금속활자를 만든 목적이 달랐다”고 했다. 활자 한 세트를 만들 때 10만 글자 넘는 한자를 파야 했으니 효율성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 국가로서 사치를 자제하고 학술을 장려했던 조선 왕조에서 문치주의(文治主義)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명품인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라고 했다. 정조 때 문신 서명응이 ‘세종께서 주조한 활자는 대대로 전할 나라의 보배’라고 한 것은 이를 짚은 말이다. 만든 목적 자체가 서양과는 달랐던 것인데 ‘인쇄 속도를 높이지 못했기 때문에 의미가 떨어진다’는 시각이야말로 서양 중심적 사고방식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동아시아 명(明)·청(淸) 시대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연구관은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학예연구사로 들어가 엄청난 분량의 활자와 만나게 됐고, 이후 조사와 논문을 통해 조선 활자의 실체를 깊이 연구해 왔다. 그는 “조선 문치주의의 숨은 공신은 그 이름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활자 기술자들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