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전경 ./조선일보 DB

5월 10일, 드디어 금단의 문이 열립니다. 그것이 잘한 결정인지 아닌지는 일단 제쳐두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청와대(靑瓦臺)가 개방되는 것은, 그곳이 실로 918년 만에 최고 권력자나 국가원수와 무관한 곳이자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됐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 그곳에 남경 궁궐을 세우기 전까지는, 백성 누구나 그 북악산 아래 자리에 마음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조선 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무과(武科) 시험을 보려는 백성들이 간혹 입장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청와대’란 세 글자를 발음해 보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던 이곳은 국민과의 활발한 소통이란 이미지보다는 ‘권위’ ‘밀실’ ‘권력독점’ ‘구중궁궐’ 같은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죠.

개인적인 경험 한 가지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는 신문사 입사 전, IMF사태 직후 잠시 한 담배회사의 종로지점 사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회사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아주 우아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습니다. “A 영업사원 계시나요~?” 어디시라고 말씀드릴까요, 묻자 그 여성은 우아함과 도도함을 한층 높이고 권위와 단호함을 한 스푼 정도 섞은, 그러면서도 짧고 속도감을 갖춘 채 은근히 위에서 찍어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딱 다섯 글자를 발음했습니다.

“청와댄데요.”

눈동자가 커진 제게서 전화를 넘겨받은 A사원은 통화를 이어가다 다소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이번 주까지는 밀린 대금을 좀 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전화를 끊은 그에게 다가가 누구시냐고 물어봤습니다.

“어? 응~ 청와대 담배가게 아줌마야.”

그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10년 전이었다면 반말로 전화했을지도 모르겠는걸.’

청와대라는 이름은 언제 생겼던 걸까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동안 그 건물의 이름은 ‘경무대(景武臺)’였습니다. 이것은 1948년에 만들어낸 이름이 아니라 조선 말 경복궁 중건 이후 후원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었습니다. 원래 ‘지역’의 이름이었던 것이 ‘건물’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죠.

대장에 진급한 백선엽(맨 왼쪽) 장군이 경무대에서 이승만(맨 오른쪽)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는 모습.

‘경복궁(景福宮)’의 ‘경(景)’과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武)’에서 한 글자씩 따 왔다는 게 통설처럼 돼 있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궁궐 관련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어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에게 ‘경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게 말이죠. 조선시대에 사람들 시호로 많이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 자체로 ‘큰 계책으로 나라의 난리를 진압한다’는 뜻이 있어요.” 그렇다면 6·25 전쟁을 앞둔 시기에 걸맞는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옛 조선총독 관저였고 광복 후에는 미 군정 사령관의 관저였던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집 이름을 ‘경무대’라 했습니다. 신생국 대한민국은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을 여유가 없었고, 이 대통령은 보수해서 쓰자는 건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일본산 전구는 모두 깨 버렸다는데, 상징적인 일제 잔재 청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1공화국의 독재가 심해지면서 ‘경무대’는 소통하지 않는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958년 김성환의 4컷 신문 만화 ‘고바우영감’은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는 어떤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귀하신 몸 행차하십니까?’라며 인사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 ‘귀하신 몸’의 정체는 ‘경무대서 똥을 치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자 만화‘고바우 영감’. 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경무대’가 지금의 이름인 ‘청와대’로 바뀐 것은 1960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이름이 청와대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수립된 뒤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 자신이 경무대에 거처한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겐 그다지 큰 권력도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에게서 경무대의 새 이름 후보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은 ‘작명인’은 언론인 출신으로 서울시사편찬위원회를 운영한 김영상(1917~2003)씨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인 김동규 서울대 신경외과학 명예교수가 최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김영상씨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진언했습니다. “경무대는 역사가 깊은 이름입니다. 잘못된 정치가 어찌 집 이름 때문일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나 집 이름을 바꾸려는 윤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다고 합니다. 사실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윤 대통령 역시 역사에 대한 식견이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김영상씨가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관저의 새 이름 후보는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①화령대(和寧臺).

②청와대(靑瓦臺).

우선 2번에 대한 설명부터 들어보죠. 관저 지붕을 덮고 있는 비취빛 청기와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영역할 경우 미국의 백악관(White House)에 대비될 수 있는 블루 하우스(Blue House)가 되니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워싱턴엔 하얀 집, 서울에는 푸른 집! 그러나 훗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블루 하우스’란 표기를 무척 싫어해 ‘Chong Wa Dae’로 쓰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집 지붕에는 언제부터 푸른 기와가 놓여졌던 걸까요? 그건 1939년 총독 관저를 신축할 당시부터였습니다. 증산교 계통 종교인 보천교 본당 십일전의 화려한 기와를 가져다가 덮었다는 겁니다. 지금의 청와대 본관은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새로 지은 것인데, 총독 관저였던 옛 청와대 건물처럼 역시 지붕을 푸른 색으로 했습니다. 그래야 ‘청와대’인 것이니까요.

구 본관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철거됐는데, 그 이유는 옛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철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 정기를 회복하자’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바로 그때 새 청와대 건물의 푸른색 지붕도 다 벗겨버리고 청와대라는 이름도 바꿨어야 균형이 맞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의 일은 그야말로 ‘주관적·선택적 일제 잔재 청산’이 아니었을까요.

조선일보 DB 청와대 구본관 철거작업이 시작된 1993년10월15일 중장비가 현관부분을 헐어내고 있다.

다시 196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김영상씨가 제출한 두 가지 이름을 본 윤보선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청기와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재인 만큼 고유한 전통을 지닌 집이라는 뜻에서 청와대로 이름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 고려시대에는 청자로 기와를 만들어 쓴 일이 많았고, 조선 전기만 해도 경복궁에서 청기와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고고학 전공자 다운 안목이 보입니다만, 일제가 총독 관저를 지을 때 청기와를 썼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화령대’에 대해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화할 화(和)에 편안할 녕(寧)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몰라서 나온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화령’이란 명칭 자체가 뜬금없다는 얘기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청와대’ 대신 대통령 관저의 이름이 될 수도 있었던 ‘화령’이란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조선왕조가 개국한 1392년,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새 나라 수립을 승인해 줄 것과 국호(國號)를 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다? 이것은 형식적인 외교 조치일 뿐, 사실상 국호는 이미 ‘조선(朝鮮)’으로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조선’과 다른 이름 하나를 넣어 두 가지를 제시한 뒤 골라달라는 것인데, 그 이름이 바로 ‘화령’이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보물 제931호).

‘조선’이야 오래전 존재했던 나라의 명칭이니 고개를 끄덕일 만했지만, ‘화령’이란 중국에서 보기에도 생소한 명칭이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걸림돌이 더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몽골제국의 두 번째 수도인 카라코룸은 한자로 화림(和林)이었고 중국어 발음은 ‘허린’입니다. 그런데 화령의 중국어 발음은 ‘허닝’이거든요. 이러니 화령이 아닌 조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얘깁니다. 그렇다면 ‘화령’은 천자국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결재파일에 넣었던 ‘버리는 카드’였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화령’은 나라의 이름을 지을 때 한 번, 국가원수가 사는 관저의 이름을 지을 때 또 한 번, 이렇게 역사의 중요한 국면에서 두 번 등장했다가 번번이 버려진 비운의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조선’에 밀렸고 그 다음엔 ‘청와대’에 밀려났던.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명나라가 예상과 달리 ‘어? 이 이름도 참 좋은데’라며 버리려고 했던 카드를 집어든다면? 이 만약의 경우를 예상한다면 플랜 B 역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이름이어야 했습니다. 조선왕조가 아닌 ‘화령왕조’가 되더라도 별 문제 없이 괜찮아야 할 정도로 좋은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 그럼 ‘화령’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이름이었을까요?

그것은 함경남도 영흥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고려 때 지명이 ‘화주’였던 것을 1369년(공민왕 18년) 화령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였습니다. ‘아,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으로 삼았구나.’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한편으론 좀 이상하기도 합니다. 나라를 세운 첫 임금의 출생지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다? 지금의 개성 출신인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 이름을 ‘송악’으로 할 것을 고려했다면 뭔가 어울리지 않는 얘기겠죠. 더구나 화주가 화령으로 바뀔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자랄 때 고향 이름도 아니라면 별다른 추억이 깃들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화령’이란 지명은 고려 말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발해 대장경의 일부로 추정되는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대방광불 화엄경 권제38 대화령국장’. 오른쪽 아래 '화령국'이란 글자가 보인다.

2004년 8월,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대장경(大藏經)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경의 실물이 공개됐습니다. 조병순(1922~2013) 성암고서박물관장이 소장했던 이 불경은 서체와 함차번호(일련번호)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 발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실시됐습니다. 같은 불경의 다른 일부는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도 있습니다. 연구 결과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이었으며 13세기 고려의 팔만대장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체 대백과사전’을 쓴 일본 학자 이지마 다치오(飯島太千雄)는 “사상 처음 발해의 대장경이 출현했고, 이는 발해에 당·신라·일본과 비견되는 불교문화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거란 대장경의 사본을 짚으며“함차번호가 같은 발해 대장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그런데 이 불경의 제목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華嚴經) 권제삼십팔(卷第三十八)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

‘대화령국장’, 즉 ‘화령국에서 만든 대장경’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화령’이란 한 나라의 이름이었습니다. 발해는 후기의 역사 기록이 거의 사라져 많은 왕들의 시호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화령’은 역사 기록에서 유실된 발해의 또 다른 명칭이거나, 발해의 남쪽이었던 남경 남해부에 해당하는 정치세력의 이름이었을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더라도, 분명한 것은 ‘화령국’이 스스로 대장경을 만들어 인쇄할 정도로 독자적인 천하관과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국사 교과서에 실린 발해의 지도. 발해 남쪽의 함남 지역은 '남경 남해부' 관할이었다.

다시 말해 ‘화령’은 일개 지역의 지명을 넘어서서 ‘조선’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대사에 존재했던 옛 나라의 이름이었습니다. 서기 926년 거란에게 멸망당한 이후 ‘잃어버린 왕국’으로 여겨졌던 발해의 또 다른 국명(國名)이, 세월이 흐른 뒤 한국사의 미묘한 국면에서 예고 없이 두 차례 불쑥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화령대’가 될 수도 있었던 청와대는 1963년 제5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 이후 또 한번 이름이 바뀔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황와대’란 이름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던 것이죠. 푸른색보다는 노란색이 전통적으로 더 존귀한 색이고, 예전 황제는 황색 옷을 입었고 황궁에는 황기와를 썼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이름을 바꿔서야 되겠느냐”며 일축했다는 얘깁니다. 그는 대통령이 황제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