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은 창작자들의 생애와 시대를 알고 나서 작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학은 보통 그런 거 없잖아요. 전후 맥락 없이 방정식부터 나오니 배우는 입장에선 ‘이게 뭔가’ 하기 쉽죠.”
본지 오피니언 면에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를 쓰고 있는 민태기(51)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은 최근 ‘벽돌’을 방불케 하는 두꺼운 연구서 ‘판타 레이’(사이언스북스)로 주목을 받았다. ‘판타 레이’란 ‘만물은 유전한다’는 뜻이다. 한 달 만에 1쇄 2000부가 다 팔렸고 ‘국내 필자가 이런 책을 쓰다니 놀랍다’는 찬사도 이어진다. ‘흐르는 것’을 연구하는 과학인 유체역학이 수백 년 동안 서양 지성사의 흐름을 이뤘고, 진화론과 상대성 이론으로 이어졌다는 것. 이 과학사의 미싱 링크(잃어버린 고리)에 대해 역사·철학·경제·예술을 넘나들며 유려하게 서술한 공학박사의 방대한 저작에 사람들은 놀랐다.
한마디로 ‘흐름에 대한 흐름(stream of stream)’을 쓴 이 책은 무엇보다 저자의 박학다식함이 돋보인다. 예를 들자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유체역학 때문에 자살 충동에 휩싸였고, 그의 친구인 경제학자 케인스는 유체역학 개념인 ‘유동성’을 학문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오직 한 분야만 파고들어서는 결코 전체를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민 소장은 말했다. “과학을 전공하더라도 다른 분야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소통하지 않는다면 과연 새로운 게 나올 수 있을까요?” 그가 누리호 발사체 엔진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걸 보면 ‘정작 자기 전공 분야에 정통하지 않은 인물’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90학번인 민 소장은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알고 싶은 것들이 무척 많았다. “박동규 교수님이 하시던 국문학 강의부터 경영학, 음대·미대 강의까지 찾아 들었습니다.” 음악 중에서도 바로크 이전 고음악을 즐겨 듣는 그는 종종 고음악 공연 해설을 할 수준에 이르게 됐다. 30년 전부터 조금씩 써 왔다는 이번 책의 부제는 ‘혁명과 낭만의 유체 과학사’인데, ‘혁명과 낭만’이란 영국의 고음악 전문 지휘자인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오케스트라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공부하다 보니 남들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사실도 알게 됐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과학자 뉴턴과 음악가 헨델은 같은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자신을 과신했던 뉴턴은 돈을 벌지 못했고, ‘딱 오페라단 유지할 돈만 벌자’고 마음먹었던 헨델은 목표를 달성했다. “과학자란 세상과 벽을 쌓고 연구에 몰두한 괴짜들이 아니라, 그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