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고운호 기자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관련,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언을 둘러싼 역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지낸 중견 정치외교사학자 김명섭(58)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인이 과거를 잘못 인식하면 미래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크다”고 말했다.

―만약 ‘미군은 점령군, 소련은 해방군’이란 인식이 맞는다면, ‘해방군’이 진주한 나라는 세계 최빈국이 됐고, ‘점령군’이 진주한 나라는 OECD 회원국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출발점에선 북한이 훨씬 잘살았다. 몰수한 일본 재산 52억달러 중 남한에 23억달러, 북한에 29억달러가 돌아갔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하고 집단적 노동력을 응집하는 체제는 단기적으로는 빨리 발전하는 것 같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은 소련도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남한은 한때 독재체제가 존재했다고 해도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헌법의 가치를 존중했고, 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갈 유연성이 있었다.”

―이재명 지사의 발언을 철 지난 이념사관의 표현으로 봐야 하나?

“인식의 오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코끼리의 일부분만 짚고 코끼리 전체를 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실 정치인이 과거를 잘못 인식하면 현재의 상황을 잘못 분석하게 되고, 미래의 비전도 잘못 그리게 되니 위험한 것이다.”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는 말도 했다.

“깨끗한 정치 현실이라는 게 과연 어디 있는가. 주어진 현실을 얼마나 개선시킬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만약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깨끗한’ 상황을 현실에서 실현하겠다고 한다면 위험한 정치가 될 수 있다.”

―'미군은 점령군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당시의 ‘점령’이란 미국과 소련 모두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일본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점령이었다. 우리가 맞은 해방이 연합국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자꾸 잊기 때문에 혼동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의 ‘천황’을 우리가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처럼 ‘점령군’도 우리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쓰지 말아야 할 용어다.”

―'친일 세력이 미군과 합작했다'는 말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구성원을 보면 이시영(임정 법무·재무총장 출신) 부통령, 이범석(광복군 참모장 출신) 총리 겸 국방장관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친일 인사들은 여기서 제외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줬다. 사실이 이런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주도 세력이 친일파였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이승만은 줄곧 미 군정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미 군정은 좌·우 합작으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 선에서 발을 빼려고 했으나 이승만은 반대했다. 만약 그가 미국을 추종했더라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유력 대선 주자가 과거사를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걸까?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불공정과 불이익의 원인에 대해 ‘역사적인 뿌리가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얘기해 준다면 상당한 응집력과 동원력을 발휘하게 된다. 물론 이념을 통해 지지 세력을 결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