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진 성균관대 중문과 명예교수가 자신이 최근 개발해 특허를 받은 ‘박보(拍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세종대왕의 ‘정간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노래 박자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김연정 객원기자

한자 전문가인 전광진(66) 성균관대 중문과 명예교수는 노래방만 가면 늘 곤혹스러웠다. 아무리 화면 속 가사를 보고 노래를 따라 불러도 도저히 박자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 제대로 못 맞추느냐”는 핀잔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사람을 음치(音癡)라고 하는데, 저처럼 박자에 둔한 ‘박치(拍癡)’ 역시 상당히 많을 겁니다.”

그런 그가 최근 특허청으로부터 특허를 받았다. ‘박자 시각화 장치, 방법 및 성악용 박자 보표’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인문학 교수가 발명특허를 취득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한마디로 악보(樂譜)가 아닌 ‘박보(拍譜)’”라며 “개발하는 데 3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박보’에 VBS(Vocal Beat Score)라는 영문 이름도 붙였다.

전 교수는 ‘왜 노래방에서 좀처럼 박자를 맞추지 못할까’란 문제를 곰곰이 따져 봤다. 화면 속 자막을 보고 어디까지가 한 박(beat)인지 정확히 알기는 불가능했다. 자막 색깔이 달라져서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노래에 따라 느리게 흐르다가도 갑자기 빨라지거나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에게 아이디어를 준 사람은 뜻밖에도 세종대왕이었다. 취미로 단소를 배우던 중 세종이 창안했다는 악보 ‘정간보(井間譜)’를 접하게 됐던 것이다.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사각형 칸(정간)을 만들어 놓고 한 칸을 1박으로 쳐서 음의 높낮이를 표시한 전통 악보다. ‘이 칸에 노래 가사를 박자에 따라 구분해 적어 놓으면 한눈에 보고 쉽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박자를 구성하는 악보의 음표 패턴이 13종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알기 쉽게 표현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노사연의 '만남'을 전광진 교수가 개발한 '박보'로 적은 것.

그는 개발을 마친 ‘박보’ 중 노사연의 ‘만남’을 예로 들었다. 4박자 노래기 때문에 사각형이 4칸인데, 처음 세 칸은 빈칸이다. 네 번째 칸에서 쉼표에 해당하는 빗금 세 개(///)가 나온 뒤에 비로소 가사 첫 부분인 ‘우리 만남은’의 ‘우’가 시작된다. 그만큼 앞부분을 많이 쉬었다 시작해야 하는 노래지만 ‘박보’를 보면 시작을 놓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다섯 번째 칸 ‘리’가 한 칸을 채운 뒤 두 칸 동안 대쉬(-)가 나오는데, ‘리’가 같은 음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다. 여덟 번째 칸의 ‘만남’은 ‘만--남’이라 표기했다. ‘만’을 이어 부른 뒤 ‘남’을 그 3분의 1 길이로 짧게 부르라는 표시다. 전 교수는 “가사 한 글자를 이어 부를 때 음이 같으면 대쉬(-), 음이 달라지면 물결(~) 표시를 했다”고 설명했다.

나훈아의 '사랑'을 전광진 교수가 개발한 '박보'로 적은 것.

전 교수는 “우리나라 노래뿐 아니라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나 덩리쥔(鄧麗君)의 ‘달빛이 내 마음을 말해 줄 거예요’ 같은 노래도 쉽게 박보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박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다는 얘기다.

문자학 전공 학자로 1999년부터 2010년까지 조선일보에 ‘생활한자’를 3317회 연재했던 전 교수는 한글 애호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세계의 문자 없는 민족이 한글로 글을 쓸 수 있도록 연구한 논문 16편을 썼다. “이번 ‘박보’ 창안을 계기로 세종대왕의 예지가 세계인의 노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결과를 낳았으면 좋겠다”는 꿈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