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을 파직시키라.”
조선 14대 임금 선조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1598년 11월 19일의 일이었다. 임진왜란 중 영의정으로서 국난 수습에 앞장섰던 명재상 유성룡은, 전란이 끝나갈 무렵 북인들의 정치적 공격이 한 달 넘에 이어지며 수세에 몰려 있었다. 마침내 선조는 유성룡 축출을 지시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종전 직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것처럼, 유성룡도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 관직을 내려놓을 운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날인 1598년 11월 19일, 남해에서는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임진왜란 최후의 전쟁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대규모의 타격을 줘 노량해전의 대승(大勝)을 거둔 이순신 장군이 해전 중 전사한 것이다. 파직당해 낙향할 처지에,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유성룡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최근 노량해전 직후 유성룡이 쓴 애도시 ‘애이통제(哀李統制)’의 초고에 적힌 원문을 판독해 일부 오류를 바로잡았다. 노 소장은 최근 ‘난중일기’의 자세한 주석본인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校註本)’(여해)에서 이 시를 소개했다. 이 시는 ‘이충무공전서’ 권12와 ‘서애집’ 권2에도 수록됐지만 마지막 7자가 빠져 있었고, 2015년 서애기념사업회의 ‘국역 류성룡시’에 번역됐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번역에선 마지막 행의 ‘循國’을 ‘殉國’으로 잘못 판독했었다.
유성룡 시 ‘애이통제’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한산도가 어디에 있는가(閑山島在何處·한산도재하처)
큰 바다 가운데 한 점 푸르네(大海之中一點碧·대해지중일점벽)
고금도는 어디에 있는가(古今島在何處·고금도재하처)
아득한 남쪽 바다 한 터럭이 비껴있네(渺渺南溟橫一髮·묘묘남명횡일발)
당시에 백번 싸운 이 장군은(當時百戰李將軍·당시백전이장군)
한 손으로 하늘 가운데의 벽을 붙잡았네(隻手扶將天半壁·척수부장천반벽)
고래를 모두 죽이니 피가 바다에 가득하고(鯨鯢戮盡血殷波·경예육진혈은파)
치솟은 화염이 물의 신이 사는 소굴을 다 태웠네(烈火燒竭馮夷窟·열화소갈풍이굴)
공이 높은데도 참소와 질투를 면하지 못하니(功高不免讒妬構·공고불면참투구)
힘써 싸우기를 꺼리지 않아 몸을 나라에 바쳤네(力戰不憚身循國·역전불탄신순국)
‘풍이(馮夷)’란 동양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신 하백(河伯)을 말한다. 시의 초고는 안동 풍산유씨 충효당이 소장한 ‘대통력(大統曆)’의 무술(戊戌)조 11월과 12월 사이 여백에 적혀 있다. 관상감에서 발행한 ‘대통력’은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역서(歷書)다.
자신과 인연이 깊었던 이순신의 전사를 나라에 목숨을 바친 ‘순국’이라 애도하면서, 두 사람 다 승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드러냈다. 특히 9행의 ‘공이 높아 참소와 질투를 면하지 못하니’에서는 삭탈관직당한 자신의 처지를 빗댄 감정이 읽힌다. 유성룡은 훗날 고향에서 집필한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