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개관 소식을 실은 조선일보 1987년 8월 16일자 1면.

“이런 국민적인 대사업이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준비했던 돈이 있어요. 이걸 조선일보사에서 첫 모금으로 접수해주시면 고맙겠어요.”

1982년 8월 31일 자 조선일보 사회면은 78세 할머니의 인터뷰를 톱기사로 실었다. 100만원을 독립기념관 건립 성금으로 내놓은 한국 민간지 최초의 여기자 추계 최은희(1904~1984)였다. 그는 “독립기념관 모금은 제2의 독립운동”이라며 “민족혼이 궐기하여 온 국민이 참여해야 참뜻이 있다”고 당부했다. “이럴 때 본때 보여야 일인들이 정신 차릴 것”이란 질타도 잊지 않았다.

그해 7월 불거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때문에 전국은 규탄 열기로 들끓었다. 조선일보는 7월 21일 자부터 이도형 주일 특파원의 ‘역사가 보고 있다사실(史實)을 위조하는 일본 교과서’를 연재하며 역사 왜곡의 실상을 앞장서서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조선일보는 역사 교과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여론을 주도했다. 7월 28일 자에 한국 ‘침략’을 ‘진출’로 표현하고 독립운동 탄압을 ‘조선인 권리 자유 제한’으로 표현했으며, 3·1 운동을 ‘데모와 폭력이 전국에 파급’이라고 서술한 사실 등 일본 교과서의 왜곡 사항을 상세히 보도했다. 다음 날 정치부장 김대중은 칼럼을 통해 “일본의 모욕에도 침묵하는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식민사관에 젖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분노한 독자들의 격려 전화가 빗발쳤고, 한국 정부는 항의 방침을 밝혔다.

이 같은 분위기는 독립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이미 1972년 8월 17일 사설에서 독립기념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선일보는, 1982년 8월 5일 정부가 이 뜻을 밝히자 11일 자 사설을 통해 “우리가 입는 정신적 상처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으므로 수난과 항거의 물증을 집약시키고 또 그 현장을 확인·보존시킨다는 결의로써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일보는 “민족적 분노를 극일(克日) 운동으로 승화시키자”고 주장하는 동시에 8월 31일 자 신문 1면에 사고(社告)를 싣고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민 성금 모금에 들어갔다. “광복 37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번영과 자존을 보장할 전당 하나 갖지 못한 우리는 마침내 뜻을 모아 민족전당의 건립에 굳센 첫걸음을 내디딥니다.” 조선일보사는 3300만원을 내놓았다. 이후 연말까지 계속된 언론사들의 성금 접수 가운데 조선일보에 모두 7443건 44억7835만원이 들어왔다. 일간지 가운데 최고 액수였다. 독립기념관은 충남 천원군 목천면(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세워졌고, 조선일보는 광복 전 사용하던 윤전기와 1930년대 문자보급운동의 교재로 발행했던 ‘한글원본’ 등을 기증했다.

1987년 8월 15일, 30여만 명의 인파가 몰린 가운데 드디어 독립기념관이 개관했다. 다음 날인 16일에는 조선일보사 주최로 4㎞ 떨어진 동성랜드에서 독립기념관 본관 ‘겨레의 집’에 이르는 ‘국민화합 대행진’이 열렸다.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하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자리 잡은 독립기념관은 2017년 누적 관람 인원 5000만 명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