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진나라의 정치가 상앙의 흉상.

중국 역사에서 급진적 개혁가로 유명한 사람이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상앙(商鞅·기원전 390~338)이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기원전 356년 진 효공에게 발탁돼 부국강병을 목표로 엄격한 법치주의 정치를 펼쳤다. 5~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십오제라는 상호 감시체제를 조직했고, 신상필벌을 강화하는 한편 신고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일종의 불고지죄를 만들었다.

그의 법이 시행된 지 10년이 되자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을 정도로 사회는 일견 안정된 모습을 갖춰가는 듯했다. 그러나 당대의 현자 조량은 “극형으로 사람을 다스리니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아놓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회 질서가 잡힌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혹독한 법 집행과 처벌을 두려워한 결과일 뿐이니 어찌 잘 다스려진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주군인 효공이 죽자 조량의 경고는 현실이 됐다. 상앙과 대립각을 세우던 태자는 반대파 귀족들과 한편이 돼 그를 역적으로 몰았다. 달아나던 상앙은 국경을 넘기 전 여관에 머물려고 했는데, 여관 주인이 투숙을 거절했다. “상군(상앙)의 법에 여행권 없는 사람은 숙박할 수 없게 돼 있어서 말이죠…” 사마천의 ‘사기’는 상앙이 여기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기록했다.

"아아, 내가 법을 만든 폐해가 나 자신에게 이르렀단 말인가(嗟乎, 爲法之敝一至此哉)!

상앙이 어떻게 숙박을 해결하고 국경을 넘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적법한 절차에 따랐을 리는 없다.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 군대에 체포된 상앙은 거열(車裂)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당해 죽었는데, 이것도 그가 만든 법에 나오는 벌이었다. 여기서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죽는다’는 ‘작법자폐(作法自斃)’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최근 사표를 제출했다가 하루도 안 돼 번복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사표를 냈던 진짜 이유는 자기가 주도했던 임대차보호법에 자기가 걸려들었던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란 의견도 나오고 있다. 전셋집을 비워야 할 처지에, 보유 주택은 기존 세입자가 나가지 않아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가 결국 법을 고치는 대신 위로금 명목의 뒷돈을 주고 해결했다. 2300년 전 상앙의 모습이 돌연 겹쳐 보일 수밖에 없다. 상앙이 여전히 중국에서 추앙받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는 두 사람의 차이가 대단히 큰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상앙의 사후에도 그가 만든 법은 사라지지 않고 진나라가 강국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결국 엄혹한 법이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진나라는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 불과 15년 만에 멸망했다. 나라를 급속히 흥하게 한 사람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폭망하게 한 사람도 모두 상앙이었던 셈이다.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당한 뒤에 결국 그 법이 역사를 바꾼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통하게 될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