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의 제사를 몸소 거행할 수 없다. 관원에게 명하여 섭행(攝行)하게 하라.”
1535년(중종 30년) 4월 27일, 조선 중종 임금이 명을 내렸다. ‘섭행’이란 ‘남을 대신해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종실록은 이때 ‘자내범염(自內犯染)’, 즉 ‘궐내에 전염병이 돌았다’고 그 이유를 기록했다. 궁녀 한 사람이 이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전염병이 돌았을 때 ‘병이 도는 것은 제사를 정결하게 지내지 못한 탓’으로 여기고 오히려 제사를 지내서 전염병을 몰아낼 것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꽤 많이 나온다. 1640년(인조 18년) 12월 11일에는 경상도 울산과 봉화 등지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기원하게 했다.
심지어 19세기 말에도 이런 얘기는 끊이지 않는다. 1886년(고종 23년) 6월 23일에는 전라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의정부는 임금에게 이렇게 진언한다. “전염병 기운이 성해 백성들의 고통이 아주 급하게 된 상황에서 기양제(祈禳祭)를 지내는 절차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기양제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개항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는데도 나라의 전염병 대책은 삼국시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직접 참여해야 하는 제사라면 상황이 아주 달라진다. ‘부정을 타서 이 지경이 된 것이니 정성을 다해 다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은 명분일 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면 접촉 기회가 많아져 전염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근대과학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었다.
앞의 나온 중종의 지시를 가만히 살펴보면, ‘섭행’이라는 고색창연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속뜻은 분명하다. ‘내 이럴 때일수록 종묘를 찾아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야 할테지만, 전염병이 궁궐 내에 돌고 있으니 솔직히 위험해서 겁이 난다. 그러니 나는 빠질 테니 신하인 너희들끼리 행사를 치르도록 하여라.’
종묘에 신위가 모셔진 것은 선대왕들의 위패고, 제사를 주재해야 할 사람은 그 자손인 임금인데 이게 무슨 소린가? 병이 옮을 수 있으니 임금만 쏙 빠지고 신하들만 위험을 감수하라고?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갖춘 임금이라면 혹시 이런 말이 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종이 누군가. 이복형인 연산군의 실정 때문에 반정 세력의 등에 업혀 얼떨결에 왕이 됐고, 사림 세력을 등용하려다 역풍을 맞아 기묘사화를 일으켰으며, 훈구파 권신들과 처가 윤씨 세력의 정쟁 속에서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임금이다. 사극에서도 ‘대장금’ 말고는 괜찮게 묘사된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임금 앞에서 신하들이 고분고분 말을 들었을 리 없다. 중종이 명을 내린 바로 그날, 영의정·좌의정·우의정 3정승의 지시를 받은 정4품 벼슬 사인(舍人) 안현이 임금에게 아뢴다. “제관이 아직 나아가지 않았고 제물도 아직 갖춰지지 않았는데도 제사를 아무 명목 없이 (전염병 중에) 행하면 모독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궐내에 전염병이 발생한 것 때문에 멈춘다면 향(香)을 받는 것도 미안하니 섭행하지 마시고 권정(權停)하소서.”
‘권정’이란 ‘정해진 일을 형편에 따라 잠시 그만둠’이란 의미니 ‘올해는 취소하자’는 말이다. ‘혼자만 쏙 빠지고 우리만 위험을 감수하라니 웃기지 말라’며 임금에게 항의하는 3정승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중종은 “내가 제사를 지내려고 이미 목욕재계를 했는데 중지하면 미안해서…”라고 변명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고 여겼는지 두 손을 든다. “권정하라.” 1535년 봄의 종묘 제사는 이렇게 취소됐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18일 “선조들도 역병이 돌면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며 그 근거로 조선왕조실록을 들었는데, 아마도 이런 기록을 말하는 것 같다. 임금의 말이 권위가 없으면 더 이상 신하들이 따르지 않는 법이다. 문득 인기 아이돌 그룹을 만나 ‘공정(公正)’을 37번이나 외친 대통령이 떠올랐다. “나는 방역을 위해 제사에 참석할 수 없으니 너희들이 참석하라”는 말은 “나와 내 측근들은 공정하지 않더라도 국민인 너희들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