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연극배우 손숙, 영화인 신영균, 만화가 이현세, 시인 신달자, 김장환 목사, 가수 김연자, 화가 박서보, 소설가 이문열,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가수 양희은,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에 이어 화가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의 ‘보물’ 이야기를 들어본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우리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웬 유학이란 말이냐?”
청운의 뜻을 품고 장도(壯途)를 계획했는데 뜻밖에도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김병종(70) 서울대 동양화과 명예교수의 젊은 시절 일이다. 열다섯 살 때 시골 다방을 빌려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그림에 대한 욕망이 컸던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씀이었어요. 원래 저는 회화과로 입학해 주로 유화를 그렸죠. 고민 끝에 ‘바깥이 아니라 내 나라 안으로 유학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미술에서 ‘우리의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동양적인 것은 무엇이고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작품 활동의 화두를 ‘탈(脫) 중국, 비(非)서구’로 삼았다. 그리고 재료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방대한 지필묵(紙筆墨) 자료를 모았다.
붓, ‘脫중국 非서구’의 미학을 찾다
경기도 과천에 있는 그의 서재 구석에는 200종이 넘는 붓이 보관돼 있다. 그걸 본 사람들은 가느다란 세필(細筆)부터 1.5m에 이르는 대형 붓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붓의 종류가 이토록 다양한 줄 몰랐다며 놀라워한다. 그것은 단순한 수집 취미가 아니라 ‘한국의 미술’을 찾기 위한 수십년 고투의 흔적이었다.
“붓은 선비 문화가 낳은 ‘인문적 재료’입니다. 종이에 붓을 대 먹이 번질 때, 그것이 마치 가슴으로 번져오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재료의 자기동일화가 일어나는 도구가 바로 붓이었다. ‘머리와 가슴을 거쳐 팔뚝과 손을 타고 내려오는 기(氣)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붓끝에 닿을 때, 그 느낌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붓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을 시도해 봤다. 수많은 붓을 써 보고 나니 그 작업이 ‘느림의 미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러 가닥 모필(毛筆)을 통해 먼 길을 돌아 미(美)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느리고 느린 재료가 붓이었다. 즉물적이고 순간의 성취를 기대하는 21세기의 특성과는 상반된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IT 강국이 되기 오래전에 이미 필묵 문화가 번성하지 않았는가?
서울대 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없이 빨라지는 시대 속 붓을 통한 사고(思考)와 여유의 브레이크를 일깨웠다. 그는 이제 2018년 개관한 남원시립 김병종미술관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붓을 잡는 욕심을 내고 싶다고 했다.
벼루, 마음과 머리에서 먼저 선을 긋다
붓과 함께 그의 ‘보물’을 이루고 있는 것이 수십종의 벼루다. 뜻밖에도 한국의 벼루는 결코 소박한 것들이 아니라 대단히 정교하고 화려한 것이 많았다. 각공(刻工)들이 단단한 돌 재료를 가지고 손재주를 발휘해 조선 민화처럼 세밀하면서 스토리가 들어 있는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1980년대만 해도 김병종은 벼루에 먹을 갈았다. 그것은 마음의 수련이자 대작의 준비 과정이기도 했다. “시간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듯한 새벽, 사냥꾼이 창 하나 들고 나서듯이 붓을 벼루 위 먹물에 묻혀 떨림과 긴장으로 그림을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숱한 고민 끝에 중국의 화선지 대신 우리의 전통 닥종이를 쓰게 됐다. 닥나무 원료를 분쇄기로 간 뒤 고운 흙과 치자를 섞었다. 반죽이 채 마르기 직전 붓으로 선을 그으면 농담(濃淡)이 자유자재로 나타났다. 이미 마음과 머리에서 선이 그어진 뒤다.
강의 노트, 한국의 美를 찾으며 소통하다
세상과 담을 쌓은 화가가 아니고자 했다. 30년 넘게 서울대 미대에서 교수로 지내며 후학을 육성하는 한편 대중과 소통하려 애썼다. 그가 지닌 ‘보물’ 중 하나는 1983년 처음으로 일반 학생이 수강할 수 있는 미술 과목을 개설했을 때 만든 꼼꼼한 강의 노트다.
당시 원로 교수들이 책상을 치며 웃었다고 한다. “미술을 어떻게 말로 가르치려는 것이냐!” 이렇게 대꾸했다. “서울대는 공부는 잘해도 미술적 감성이 부족한 집단 아닙니까?” 과연 학생들은 그 강의로 몰려들었고, 한번에 500명 넘게 수강한 학기도 있었다.
학생들과 소통하는 한편, ‘진리는 장공만리가 아니라 자네 눈썹 아래 있다’는 스승 서세옥(1929~2020) 화백의 가르침을 거울 삼아 재료와 기법의 동어반복적 패턴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했다. 강렬한 색채와 문학적 서사를 담은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연작이 인정받았고, 대영박물관의 학예사가 스튜디오를 찾아 작품을 골라 사갔으며, 중국 최대 현대미술관 진르(今日)미술관에서 그의 대작들이 조명받았다.
고(故) 이어령 선생은 “앞으로는 당신처럼 그림에 수공업적 손맛을 내는 사람들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 탐색한 ‘한국적 미학’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분청사기의 표면 같은 두터움 속 수수함과 텁텁함과 훈훈함이 담겨진 것, 시골의 토담처럼 생활 정서와 분리되지 않은 것,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시간의 앙금이 느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