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 출연한 배우 김유정(왼쪽). 어린 시절부터 셰익스피어 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해 탄생한 작품이라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비올라라는 인물이 매력적이었어요." /쇼노트

김유정은 출연작이 60편에 이르지만 고작 스물네 살이다. 영화·드라마에서 임수정, 송혜교, 문근영, 한효주 등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고 공중파 3사에서 아역상 트리플크라운을 차지한 배우. 그녀는 이 겨울에 또 하나의 허들을 넘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로 연극 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제목은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라는 뜻이지만 관객은 김유정과 사랑에 빠졌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올 들어 연극 예매 1위(공연예술 통합전산망)를 질주하고 있다. 귀네스 팰트로 주연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7관왕을 차지한 영화가 원작. ‘빌리 엘리어트’의 작가 리 홀이 각색한 연극은 이번이 국내 초연이다. 16세기 영국 런던, 글이 막혀 슬럼프에 빠진 셰익스피어가 오디션을 보러 온 미소년 켄트에게 매료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배우 김유정

여자는 배우가 될 수 없던 시대, 켄트는 사실 부잣집 딸 비올라가 남장을 한 모습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연회장에서 마주친 비올라에게 반하는데, 그녀가 켄트라는 사실을 알고 비밀스러운 연애에 빠져든다. 사랑이 뮤즈가 된 것일까. 영감을 받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글이 샘솟는다. 이 연극은 그가 어떻게 ‘로미오와 줄리엣’을 집필했는지 상상해 보여주는 셈이다.

배우 김유정은 켄트와 비올라를 부드럽게 왕복한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을 지나온 터라 콧수염도 남장 연기도 낯설지 않았다. 발코니 장면에선 원전에 있는 대사들을 위트 있게 고쳐 사용했다. 이 연극은 허구와 현실을 절묘하게 뒤섞으면서 관객을 집중시킨다. 그런데 켄트가 출연하는 극중극(로미오와 줄리엣)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비올라는 2주 후 정략결혼을 해야 하고, 켄트는 신분이 들통나며 극장이 폐쇄된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는 두 개의 바퀴가 있다. 현실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쓰는 셰익스피어와 배우를 동경하는 비올라가 하나, 극 중에서 온갖 난관을 뚫고 사랑을 완성해야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다른 하나다. 희비극이 겹쳐 굴러간다. 연극은 토월극장의 깊이와 무대 하부까지 100% 활용하며 이 중첩된 이야기를 펼쳐냈다. 라이브 연주도 곁들이며 시청각적으로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곤 했다.

아역 배우 시절의 김유정

큰 눈망울과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배우 김유정은 연기 경력만 20년이다. 기억이 나는 첫 작품은 여섯 살 때 촬영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납치되는 아이로 등장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폐건물 같은 곳에서 찍었는데 내 앞에 정말 무서운 분이 계셨거든요.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우느라 대사를 한 마디도 못해서 엄마한테 혼났죠(웃음). 나중에 알았는데 그 무서운 분이 최민식 선배님이었어요.”

김유정이 영화 ‘추격자’에서 배우 김윤석에게 “쓰레기”라고 할 때 눈빛과 표정 연기는 지금 봐도 압권이다. 영화 ‘해운대’에서는 엄정화가 목숨을 버리며 지킨 딸로 열연하면서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엄정화 말마따나 “떡잎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엿한 성인 배우로 성장”했다.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배우가 되고 싶어 남장을 한 비올라(김유정). “시와 모험, 진정한 사랑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한다. /쇼노트

관객과 한 공기를 마셔야 하고 편집이 없는 연극 무대에서도 김유정은 존재감이 빛났다. 몸놀림은 편안했고 발성은 부족하지 않았다. 함께 도망가자는 셰익스피어를 향해 비올라는 답한다. “세상으로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빼앗은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마음속에 당신의 글 속에 영원히 살게 해주세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덤 장면까지, 김유정은 연극 무대에서도 매력적인 첫걸음을 뗐다. 이 배우는 “좋아하는 것들을 열정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비올라와 닮았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표현과 대사들이 연습을 할수록 더 깊고 풍부해지면서 빠져든 연극”이라며 “공감할 수 있는 코미디와 사랑, 꿈이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비올라 역은 김유정·채수빈·정소민 등 대중에게 친숙한 배우들이 나눠 맡는다. 14세 이상 관람가. 3월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드라마와 영화로 낯익은 배우 정소민·채수빈·김유정(왼쪽부터)이 비올라 역을 나눠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