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에는 장난기 있게 불렀다면 이번 노래 ‘투나잇(tonight)’은 정반대 분위기예요. 지금 싸우러 가는 길입니다. 저음이라도 긴장감 있는 사운드를 들려주세요.”
지난 17일 오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오디션이 열린 서울 광림아트센터 6층 연습실은 공기부터 달랐다. 당락(當落)이 갈리는 시험대. 음악감독 김문정, 연출가 김동연, 푸에르토리코계 안무가 훌리오 몽헤 앞에 남자 앙상블로 지원한 ‘XX번’이 섰다. 차돌 같은 표정으로 그가 ‘투나잇’을 부르기 시작했다. “제대로 끝장내줄게 이 밤/ 다 부숴, 박살내줄게 이 밤/ 정정당당히 싸워, 페어 플레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국내 공연은 2007년 이후 15년 만이다. 쇼노트 임수희 본부장은 “오디션에 1000여 명이 몰렸는데 코로나 이전에도 보기 드문 규모”라며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하데스타운’ ‘엑스칼리버’ ‘맨 오브 라만차’ ‘42번가’ ‘맘마미아’ 등 대형 뮤지컬에 출연한 스타들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5분 안에 ‘나’를 표현하라
오디션은 뮤지컬의 흥행과 직결된다. “배우 잘 뽑으면 절반은 성공”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날은 노래 두 곡과 연기 한 토막을 심사했다. 주어진 시간은 1인당 5분. 배역(모두 36개)을 향해 달린 오디션 현장에는 확신과 의심, 환호와 한숨이 교차했다.
1957년 초연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미국 뉴욕에 사는 가난한 백인 청년 토니와 푸에르토리코에서 갓 이민 온 마리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했고 스티븐 손드하임이 가사를 붙였다. 연출가 김동연은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들은 이 뮤지컬을 향한 동경, 특히 아름다운 음악과 춤에 대한 애정이 충만했다”며 “거의 다 젊은 배역이라 뜨거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앙상블 배우에게도 캐릭터에 맞는 춤이 따로 있다는 게 특징이다. 걸음걸이, 시선 처리, 회전, 점프···. 안무가 훌리오 몽헤는 지원자들에게 날카로운 움직임을 지도하며 “자세 낮추고(stay low)!”를 외쳤다. 그는 “요즘 뮤지컬은 대체로 노래가 이끌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춤을 상당한 수준까지 소화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오디션의 비밀
지금 극장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걸려 있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분열과 갈등은 여전하다. 이번 오디션에서 여자 앙상블 지원자들은 ‘아메리카’ ‘아이 필 프리티’ ‘섬웨어’ 등을 불렀다. 김문정 음악감독은 “남녀 주인공은 고음에서 편하고 풍부하며 아름다운 음색을 내야 한다”며 “드라마틱한 음악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심사 기준은 작품마다 다르다. 뮤지컬 ‘42번가’는 막이 오를 때 탭댄스를 추는 쇼걸들의 다리부터 보이기 때문에 하체 라인이 좋아야 한다. ‘빌리 엘리어트’ 주인공은 ‘10~12세, 신장 150cm 이하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이 필요하다. ‘영웅’은 교수대에서 부르는 노래와 감정이 안중근과 얼마나 가까운지가 포인트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주인공 팬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외모보다 아우라가 더 중요하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오디션은 21일까지다. 공연은 오는 11월 충무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만난다. 배우 로버트 드니로는 “거절당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라며 “오디션에 떨어지더라도 ‘다음 기회’를 되뇌면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안무가 훌리오 몽헤 Q&A
–1957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초연할 당시 제롬 로빈스의 안무는 어떤 점에서 훌륭했나요?
“제롬 로빈스의 오리지널 안무가 대단하고 혁신적이었던 까닭은 연기(액션)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안무를 사용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에게 안무는 곧 캐릭터에 기인한 액션이에요. 춤을 스토리텔링의 요소로 사용하는 방식이 그만한 규모로 이루어진 적은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춤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대본, 음악, 가사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해 뮤지컬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게 됩니다. 로빈스는 브로드웨이에서 연출과 안무를 겸할 수 있다는 현대적 개념을 처음 실현한 인물이에요.”
–오디션에서 만나본 한국 배우들의 춤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장단점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한국 배우들은 세계 어느 곳의 배우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해요. 다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작품을 마주할 때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춤과 움직임이 사용되는 방식은 요즘 시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이에요. 오늘날 대부분의 뮤지컬은 노래가 주도하는 뮤지컬입니다. 춤은 스토리텔링에 부차적인 역할만 담당하고 있지요. 요즘 배우들은 밥 포시, 마이클 베넷, 제롬 로빈스 같은 안무가가 활약했던 시기에 주어지던 안무적 챌린지를 수행하지는 않는 셈이에요. 그 과정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뮤지컬을 할 때 배우들에게 필요했던 ‘근육’들도 빠져나갔다고 할까요. 이 뮤지컬은 팀원 전체가 이른바 ‘삼종 세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춤과 노래와 연기를 모두 상당한 수준으로 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세계 어느 지역 배우들에게나 큰 도전일 수밖에 없지요.”
–이번 한국 공연에서 관객은 어떤 춤을 기대하고 극장에 가면 좋을까요?
“우리가 이 쇼를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무대 공연의 위대함, 그 기술적 완성도가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관객이 새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빈스, 번스타인, 로렌츠, 손드하임은 이 쇼를 처음 구상할 때부터 그것을 목표로 잡았어요. 자신들이 예술적으로 얼마나 높이 도달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동시에 엔터테인먼트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말이죠. 한국 관객이 보게 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런 의미에서 최고를 지향합니다. 위대한 음악과 뛰어난 연기, 경이로운 캐릭터들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밤새도록 춤추고 움직이는 이런 쇼는 아주 드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