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영국의 한 극장. ‘리어왕’에서 늙은 왕을 연기해야 하는 노배우(송승환)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분장실에서 대사를 읊는데 엉뚱하게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가 튀어나온다. 개막을 5분 앞두곤 공습 사이렌까지 울린다. 오늘 밤 제대로 공연할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배우 송승환(64)이 연극을 올린다는 소식도 그런 불안감부터 안겼다. 시각장애 4급. 안 보이는 눈으로 무대 연기가 가능할까. 그가 주인공인 ‘더 드레서’는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몇 회 만에 취소됐다. 잔인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송승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올해 다시 그 연극을 공연한다. 지난 10일 정동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이 배우는 거짓말처럼 멀쩡해 보였다. 몸놀림은 경쾌했고 대사는 묵직했다.
“사실 지금 이 방 안에 안개가 가득 끼어 있는 것 같아요. 앞에 사람이 있어도 형체만 보입니다. 자로 재봤는데 30cm 안쪽으로 다가와야만 누군지 알 수 있어요.”
송승환은 지금 ‘30cm의 세상’에 포위돼 있다. 그 너머는 아득한 절벽과 같다.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어간 지 4년. “평창동계올림픽(총감독)을 끝내 놓고 눈이 어두워지면서 인생을 돌아보게 됐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이 뭔지 생각해 보니 배우였어요. 연기를 다시 하고 싶었습니다. ‘난타’ 같은 공연 제작이나 비즈니스는 눈이 좋아야 해요. 상대방 눈빛을 보고 저놈이 진실한지 사기를 치는지 파악해야 하니까. 하하하.”
명랑한 웃음소리였다. 한때는 ‘6개월 안에 실명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다행히 병은 진행을 멈췄다. 송승환은 “처음엔 실망했고 겁도 났지만 눈이 나빠도 일을 계속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며 “대본을 볼 수는 없지만 들으면서 외울 순 있고, 연극은 한 달 이상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니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연출가 장유정은 “가끔은 선생님 눈이 안 보인다는 걸 깜빡 잊을 정도”라고 했다.
“집사람도 깜빡깜빡해요. 함께 길을 가다가 ‘저 꽃 예쁘지?’ 합니다. 퉁명스럽게 ‘난 안 보여!’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농담처럼 ‘앞으론 눈에 반창고 붙이고 다녀야겠다’ 그래요(웃음).”
뿌연 안개 속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고 송승환은 말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드라마와 연극, ‘난타’와 평창올림픽도 혼자 한 게 아니잖아요.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수많은 사람과 함께 만든 겁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만큼이라도 보인다는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요.”
‘더 드레서’는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작가 로널드 하우드가 대본을 썼다. 쇠약해진 몸으로도 무대에 서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노배우와 의상 담당자 노먼의 엇갈린 우정을 그린다. 16일부터 정동극장에선 송승환이 노배우, 오만석·김다현이 노먼을 번갈아 연기한다. “인간의 다면성을 표현한 작품이에요. 노배우는 예술가지만 속물 근성이 있는데 저도 그랬어요. 방송국에서 내 개런티 계약할 때는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했고 내가 제작자일 땐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 했으니까(웃음).”
시각을 잃자 청각이 더 예민해졌다. 송승환은 “무대에서 반응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남의 얘기를 귀담아듣게 됐다”며 “뜻밖의 수확”이라고 했다. “이 병에 걸리고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후유증이 우울증과 자살이더라고요. 나는 그렇게 되진 말아야지. 시계는 좁아졌지만 제 세계는 넓어졌어요. 일상을 유지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욕이 생겼고 자신감도 되찾았지요. 이제 책은 전자 파일로 바꿔서 ‘듣고’, 문자 메시지는 500원짜리 동전만 하게 확대해 ‘보고’, 넷플릭스 영화는 자막 읽어주는 기능을 사용해 감상합니다.”
아역 배우로 출발해 제작자로도 성공한 그는 “인생 3막은 노역 배우로 살겠다”고 했다. 시력을 잃고 좀 느려졌지만 천천히 단순하게 사는 것도 좋겠다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동시다발로 여러 일을 벌이며 참 바쁘게 살았는데 이 눈 때문에 정리가 됐어요. 계속 할 일과 안 해도 되는 일로. 차기작요? 벌써 정해뒀지요.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보다는 다음에 할 배역이 없는 게 더 불안해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