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맛

김풍기 지음 | 글항아리 | 480쪽 | 2만5000원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음식 하나에도 나의 전 생애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법이다.” 책 속의 이 진술에 동의한다면 책을 펼치는 순간 400년 전 이 땅의 음식과 풍토를 테마로 삼은 여행을 떠나게 되는 셈이다.

“나의 외가는 강릉인데 그곳에는 방풍(나물)이 많이 난다.” 이렇게 시작하는 기록은 강릉 사람들이 2월에 새벽같이 나가 막 돋아난 방풍 싹을 뜯은 뒤 죽이 반쯤 익었을 때 넣는다고 했다. 다 끓은 죽을 차가운 사기 그릇에 옮겨 담고 반쯤 식었을 때 떠서 먹는다. 그 맛은 어땠을까.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해 사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다.”

교산 허균의 영정.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누가 어느 책에 이런 내용을 썼을까. 저자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지식인인 교산 허균(1569~1618), 책은 한국 최초의 음식 평론서이자 미식서(美食書)라는 말을 듣는 ‘도문대작(屠門大嚼)’이다.

1610년(광해군 2년) 허균은 과거 시험 부정 의혹에 연루돼 졸지에 파직되고 전라도 함열(지금의 익산시 함열읍)로 귀양을 갔다. 천지간에 자유를 빼앗긴 그에게 과거에 맛본 그리운 음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쓴 ‘도문대작’의 제목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곤궁한 처지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숱한 장면과 함께한 ‘맛’을 소환해 낸 것이다.

허균이 미식가가 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회고한다. 자기 집이 가난하기는 했지만 명망 높은 선비였던 부친 초당(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가 초당두부를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허엽이 살아 있을 때 예물이 많이 들어와 온갖 진귀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커서는 부잣집에 장가들어 산해진미를 경험했다. 임진왜란 피란길에 강릉 외갓집으로 가서 또 귀한 음식을 맛봤다. 벼슬길에 나선 뒤 공무로 남북을 오가며 여러 향토 음식을 접했다. “입호사를 하느라 맛난 고기든 아름다운 꽃부리든 씹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미식의 노정은 신산한 가시밭길이기도 했다. 만삭의 아내는 피란길 위에서 아들을 낳고 숨졌고 아기도 곧 엄마 뒤를 따랐다. 천신만고 끝에 폐허나 다름없는 강릉 외갓집에 도착한 허균의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준 ‘위로와 치유의 음식’이 바로 방풍죽이었다. 12년 뒤 황해도 수안군수가 된 허균은 문득 그 맛이 그리워 방풍죽을 끓이게 했지만 그때의 향긋함은 느낄 수 없었다. 토양이나 조리법이 달랐을까? 그게 아니라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느꼈던 절실한 맛이 더 이상 날 리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어부들이 강가에 모여 물고기를 반찬 삼아 식사하는 것을 그린 김득신의 ‘강상회음’. /간송미술문화재단

명성이 꽤 알려진 ‘도문대작’이지만 막상 그걸 읽어본 사람은 실망하기 마련이다. 조선 팔도 대표 특산물의 족보를 기록했으나 목록이나 암호문을 연상케 할 만큼 서술이 너무나 간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책은 언젠가 그 임자를 만나기 마련이다. ‘허균의 맛’은 대표적인 허균 연구자이자, 허균이 살았던 강릉 출신이자, 1961년생으로서 아직은 전통의 끝자락이 남아 있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국문학자 김풍기 강원대 교수에 의해 집필됐다.

이 책에서 ‘도문대작’의 원문과 번역문이 차지하는 분량은 단 7%다. 그럼 나머지는? 원서의 항목을 재구성해 출처를 살피고 관찬 지지(地誌)와 개인 문집 같은 당대 자료까지 뒤져 고증을 거친 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음식 문화까지 되살려 풍성한 인문학적 해설을 씀으로써 ‘조선 미식의 세계’에 대한 복원을 시도했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입에 군침이 돌 정도다. 당시 강릉의 배 ‘천사리’는 크기가 사발만 한 달고 연한 품종이었고, 개성과 전주, 서울 홍제천 근처에선 입에 쩍쩍 달라붙는 엿을 고아 내고 있었다. 한강 동호대교 부근의 섬인 저자도에선 작은 밤 크기의 맛이 단 앵두가 났고, 북방 산골에 가면 곰 발바닥과 사슴 꼬리 같은 귀한 음식을 내 왔다.

평안도 양덕과 맹산의 꿩은 집오리만 하고 기름이 엉겼는데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겨울철 별미였던 얼린 숭어는 얼음을 채우던 백성들의 노고가 서린 음식이었다. 한꺼번에 다 읽기보다는 65개 장(章)을 하나씩 천천히 음미하듯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