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위기, 트럼프 제2기와 흔들리는 국제 정세, AI 시대의 본격적인 도래, K문학의 약진과 젊은 작가들의 활약…. ’2025 올해의 책’을 통해 올 한 해를 톺아보자면 이런 키워드들로 요약할 수 있다. ’2025 올해의 책’은 지난해 12월~올해 11월 조선일보 지면에 소개된 책들을 중심으로 본지 문화부 기자들이 격론을 거쳐 후보군을 추려냈다. 또한 강동호 문학평론가, 박소령 비즈니스 칼럼니스트, 신승한 광운대 교수, 윤고은 소설가, 이수은 독서가, 장강명 소설가 등 본지 북칼럼 필진들로부터 지난해 12월~올해 11월 국내 출간된 책 중 장르 불문하고 3권씩을 추천받았다. 이 중 올해의 세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10권을 최종적으로 선정했다.
[정치 외교] 엘리트 과잉이 국가 위기 원인 “가장 위험한 직군은 법조인”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피터 터친 지음|유강은 옮김|생각의힘|424쪽|2만3800원
계엄 이후 국가와 민주주의의 붕괴가 우려된 올 한 해, 각계각층 지식인들이 여러 번 호명한 책이다. 이론 생물학자인 저자는 ‘권력 소유자’인 ‘엘리트’의 과잉 생산이 국가의 위기를 추동하는 가장 큰 구조적 요인이라고 짚는다. “현대사회의 고학력자 급증으로 권력을 갖고자 하는 ‘엘리트 지망자’는 늘어나는데, 정부 요직의 수는 한정돼 있다. 좌절한 엘리트 지망자들이 반(反)엘리트 세력이 되어 체제 전복을 꿈꾸면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한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엘리트 내부 충돌의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면서 “사회 안정에 가장 위험한 직군은 ‘법률 전문직’”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는 이 시점에 여러 생각거리를 던진다. /곽아람 기자
[정치 외교] 수치심을 ‘피해자 서사’로 바꿔 빈곤층 백인 사로잡은 트럼프
도둑맞은 자부심|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이종민 옮김|어크로스|484쪽|2만3000원
‘트럼프 2기’를 빼놓고 올해 국제 정세를 논할 순 없다. 감정 사회학 분야 선구자인 저자가 ‘이념’ 아닌 ‘감정’이 정치적 선택을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해 빈곤층 백인들이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분석한다.
트럼프는 주력 산업이 쇠락하며 자부심을 잃은 러스트벨트 지역 유권자들의 수치심을 ‘피해자의 서사’로 다시 썼다. 저자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당신 책임이 아니라 민주당의 역차별로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이 혜택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트럼프의 프레이밍 덕에 이들이 자부심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것’이라 느끼게 됐다고 주장한다. 2020년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감정’이 우리 정치적 지형의 어떤 지점과 맞닿아 있는지 숙고하게 한다. /곽아람 기자
[AI] ‘깐부 회동’ 젠슨 황의 철학 “실패는 모두 공유해야 한다”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스티븐 위트 지음|백우진 옮김|RHK|496쪽|2만8000원
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제가 된 장면 중 하나는 이른바 ‘깐부 회동’이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기업 총수들과 소맥을 러브샷하고 시민들에게 치킨을 나눠주는 장면이 국민들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책은 젠슨 황에 대한 첫 공식 전기다. 뉴요커 기자가 썼다. 3년간 젠슨 황과 관계된 핵심 인물 300여 명을 인터뷰했다. “실패는 모두 공유해야 한다”는 CEO의 철학이 기능적 분노로 표출된다는 통찰 등 리더십을 서술하는 방식이 디테일하다.
박소령 비즈니스 칼럼니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인 젠슨 황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며 “AI 시장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하기에도 좋다”면서 추천했다. /박진성 기자
[역사] 밀랍 서판부터 밥 딜런 노트… 인류와 함께한 ‘메모의 역사’
쓰는 인간 | 롤런드 앨런 지음 | 손성화 옮김 | 상상스퀘어 | 544쪽 | 2만4000원
당장 연필이나 볼펜을 집어들고 종이 위에 뭔가를 휘갈기는 이 단순한 행위가, 사실은 인류 문명과 함께 해온 대단히 창조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책이다. 기원전 14세기의 밀랍 서판에서부터 로마 시대의 휴대용 서판, 중세 말 출현한 종이 제본 노트, 애거서 크리스티와 밥 딜런의 걸작을 낳은 메모들로 이어지는 ‘노트와 메모의 역사’가 대단히 흥미롭다.
영국 작가인 저자는 거의 선행 연구가 없는 미답의 분야에서, 장구한 역사 곳곳에 찢어낸 노트 낱장처럼 흩어져 있던 ‘쓰기’의 편린들을 모아 엮어 냈다. 새로운 정보를 컴퓨터에 타이핑할 때보다 직접 쓸 때 훨씬 더 집중할 수 있는데, 기억으로 암호화하며 간추리고 각자의 두뇌와 개성에 맞춰 개념도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석재 기자
[역사] 동심의 눈으로 본 일제시대… 해석 거치지 않은 과거의 肉聲
제국의 어린이들|이영은 지음|을유문화사|324쪽|1만8000원
일제강점기 영화·연극 및 한일 관계사 연구자가 쓴 이 책은 가장 천진한 눈으로 가장 잔혹한 시대를 바라본 기록이다. 일제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8년부터 7년간 조선 거주 일본인·조선인 소학생 대상 글짓기 대회를 개최했다. 1~2회 우수작을 엮어 ‘총독상 모범 문집’을 펴냈다. 책은 이 문집에 드러난 어린이들의 내면세계를 바탕으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들여다본다. 조선총독부의 ‘모범적인 어린이상’을 대변한다는 가정 아래 수상작들을 분석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간극에도 어쩔 수 없이 비어져나오는 동심이 맑고 아찔한 충격을 안긴다. 신승한 광운대 교수는 “해석의 틀을 거쳐 가공되지 않은 과거 세대의 육성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드물고도 귀중한 기록”이라며 추천했다. /곽아람 기자
[과학] 열 종의 바다 생물을 통해 인간 삶에 질문을 던지다
빛은 얼마나 깊이 스미는가|사브리나 임블러 지음|김명남 옮김|아르테|268쪽|2만원
열 종의 바다 생물을 통해 인간을 통찰하는 논픽션이다. 트라우마·정체성·성장·결핍 등의 과학 지식이 인간 삶과 상호작용하며 하나로 이어진다.
일생에 단 한 번 알을 낳는 문어는 알을 품는 동안 밥을 굶는다. 자리를 뜨는 순간 천적들에게 새끼가 잡아먹히기 때문. 자줏빛 문어는 4년 반을 굶고 흰색 문어가 돼버린다. 책에서 만나는 동물들은 삶을 살아내는 동안 어느 경계에서 길을 잃은 독자에게 위로를 전한다.
과학 저널리스트의 생생한 문장이 세계를 살아가는 무한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 윤고은은 이렇게 말한다. “올해 독자를 만나는 여러 자리에서 이 책을 언급했다. 바다 생물들을 따라가는 동안 지금 내 삶에 대한 섬세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박진성 기자
[시] 유쾌한 그릇에 담은 고통들… 김혜순 시인의 새로운 리듬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 아네모네 | 김혜순 시집 | 난다 | 196쪽 | 1만3000원
올해 독자들은 새로운 김혜순 시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며 “웃음의 그릇”에 담은 명랑한 시들. “고통도 슬픔도 비극도 유쾌한 그릇”에 담았다. 죽음에 가닿았기에 얻을 수 있는, 어둠을 끌어안은 명랑함이다.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등 ‘죽음 3부작’을 한데 모은 ‘죽음 트릴로지’(문학과지성사)부터 읽는다면 이 새로운 리듬이 더 각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죽음 트릴로지’를 올해의 책으로 꼽은 강동호 문학평론가는 “한 시인이 평생에 걸쳐 죽음과 함께 써온 언어를 한 권에 모았을 때, 그것은 단순한 종합을 넘어, 한국어 시가 감당해온 세계를 다시 가늠하게 하는 거대한 실험이 된다”고 했다. /황지윤 기자
[소설]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는 소설” 한국 사회 문제들의 파노라마
혼모노 | 성해나 소설집 | 창비 | 368쪽 | 1만8000원
배우 박정민의 추천사(“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가 화제를 일으키며 이 책의 흥행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전부터 성해나는 문단과 문학 애호가들이 주목하는 작가였다. 2019년 등단하고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을 펴낸 이야기꾼의 다음 작품을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중에 나온 두 번째 소설집. 직선적인 플롯, 꾸밈없는 문장으로 사회적 조감도를 펼쳐 보이는 거침없음이 돋보인다. 한국 사회가 떠안은 문제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진짜 무당과 가짜 무당(‘혼모노’), 시아버지와 며느리(‘잉태기’), 비난받는 영화감독과 그의 팬(‘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등 단조로울 틈 없이 개성 넘치는 인물이 와르르 쏟아지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크다. /황지윤 기자
[에세이] 에드워드 리의 음식 에세이… 역사·추억까지 엮어낸 한상
버터밀크 그래피티|에드워드 리 지음|박아람 옮김|위즈덤하우스|416쪽|2만3800원
예능 ‘흑백요리사’로 사랑받은 한국계 미국인 셰프가 2년간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쓴 음식 에세이다. 화려한 스타 셰프의 레스토랑이 아닌,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낡고 소박한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미국 음식’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류에서 비껴나 있는 이민자들의 삶, 음식과 지역의 역사, 한국계 이민자였던 자신의 사적인 추억까지 아름답게 엮어낸다.
호기심 넘치는 요리사가 비기(祕技)를 찾아 떠나는 모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그 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성장 소설처럼 뭉클하다. ‘올해의 책’ 후보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음식과 도시, 사람이라는 삼박자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책. 에드워드 리가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요리와 글쓰기가 그의 삶에서 두 축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등의 추천평이 있었다. /백수진 기자
[그림책] 안나카레니나·작은아씨들… 그림 한 장에 펼쳐진 명작들
문학 속의 풍경들 | 리카르도 렌돈 지음 | 누리아 솔소나 그림 | 남진희 옮김 | 로즈윙클프레스 | 64쪽 | 2만8000원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언어로 쌓아 올린 이야기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이다. 25편의 걸작 속 풍경이 섬세한 세밀화로 널찍하게 펼쳐진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태운 기차가 달리는 눈 덮인 러시아 황무지부터 쥘 베른의 주인공들이 ‘지구 속 여행’을 시작하는 아이슬란드의 스네펠스 화산까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고행하는 인도 북부의 강부터 ‘작은 아씨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질 듯한 미국 매사추세츠의 시골 마을까지….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속 콜롬비아 막달레나강의 황토 물줄기와 미시마 유키오의 ‘파도 소리’ 속 파도의 흰 포말 위로 붉게 늘어진 단풍나무들도 모두 그림 한 장에 담았다.
작품 속 인용문과 작품과 작가에 대한 짧고 굵은 설명도 알차다. 오래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보이는 책이다. /이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