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1919
마거릿 맥밀런 지음 |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976쪽 | 5만5000원
“1919년 파리는 세계의 수도였다”는 것이 이 책의 첫 문장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그곳에선 세계를 재편(再編)하려는 거대한 테이블이 마련됐다. 이해 1월부터 무려 반년에 걸쳐 이어진 ‘파리강화회의’ 기간 파리는 세계의 정부이자 상고법원이었고 의회였다. 이런 자리는 두 번 다시 세계에서 재현되지 않았다.
‘평화를 끝낸 전쟁’에서 왜 1차 대전이 일어났는가를 자세히 분석했던 영국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은, 2001년 초판을 냈던 이 책(원제 Paris 1919)에서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다각도로 해부한다. 지금껏 ‘패전국 독일에 너무 많은 부담을 줬기 때문에 끝내 2차 대전을 초래한 회담’, 간단히 말해 ‘실패한 회담’으로만 치부됐던 파리강화회의가, 사실은 그 이후의 세계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당시엔 그저 ‘대전쟁(Great War)’이라고만 불렸던 1차 대전은 지구의 질서를 다시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거대한 충격이었다. 세계를 문명화시키겠다는 사명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던 유럽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어리석은 대규모 파괴와 살상에 가담했다. 세상은 더 이상 어제와 같지 않았다.
‘제국’들은 붕괴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기존의 전제정을 ‘아직은 아무도 몰랐던 체제’인 공산주의로 바꿔 놓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해 유럽 한가운데 거대한 싱크홀을 만들었다. 독일은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뒤바뀌었다. 동쪽의 오스만 제국도 해체의 운명에 놓였다. 역사에 묻혀 있던 폴란드와 발트 3국이 다시 생명을 얻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가 새로 탄생하려고 애를 썼다.
새로운 세계 질서와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중차대한 결정은 누가 주도했나? 승전국의 네 거두였다. ‘4인 평의회’를 구성한 미국 대통령 윌슨,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 총리 오를란도였다. 강화회의에는 29국에서 참석했으나 ‘중소국’들은 점차 배제됐다. 4국 대표는 때론 자국의 이익을 고수하려 발버둥치다가도 현지 사정을 모르면서 제멋대로 결정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인다. 오만과 편견과 확증편향이 횡행했다.
그런데 파리로 모여든 사람은 이들뿐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무수한 ‘대변자’들이 숱한 대의명분과 이해관계를 지니고 파리로 향했다. 범세계적 안보 조직을 창설하는 의제와 신생 국가 수립부터 국경 조정, 인권 신장, 패전국 처벌 등 갈라진 기존 세계에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부여하려는 이합집산과 분투가 펼쳐졌다. 여성 투표권, 흑인 인권, 노동헌장, 군비 축소, 아일랜드 독립 요구가 펼쳐지는가 하면, 재건된 폴란드, 유대인의 고향, 독립 우크라이나, 쿠르디스탄과 아르메니아를 놓고 각국의 계략이 펼쳐졌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며 파리강화회의는 일단락됐다. 그 231조에서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과 각종 제약을 부과해 두고두고 욕을 먹었지만, 저자는 ‘2차 대전의 발발은 전간기(戰間期·1·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18~1939년) 정치가들의 행보와 국제 정세에 따른 것이지, 파리강화회의의 네 거두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들이 더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는 중동부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대한 처리였다. 결정을 위한 지도는 부정확했고 숱한 이해관계자의 청원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작위적으로 설정된 국경은 오히려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낳아 갈등을 부추겼다. 게다가 민족자결 원칙에 들어맞지 않는 새 이스라엘 국가 창설을 승인해 중동 전쟁의 불씨를 남겼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이 책은 쓴맛을 남긴다. 회담의 한복판에 한국에선 3·1 운동이 일어났으나 정작 파리에선 별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설 국제연맹 규약에서 일본이 주장한 ‘인종 평등’ 규약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더 이슈가 됐다. 해체된 유럽 구 제국의 처리를 위한 정치적 방편이었던 민족자결주의에 당시 한국인들이 그토록 기대를 지녔던 것을 생각하면 슬퍼질 정도다. 100여 년 전 세계는 식민지 한국을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