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인간
롤런드 앨런 지음 | 손성화 옮김 | 상상스퀘어 | 544쪽 | 2만4000원
“뭐라고요? 몰스킨 전용 펜이 단종됐다고요?”
얼마 전 서울 광화문의 대형 서점 문구 매장에서 한 중년 남성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원이 타 브랜드의 대체 펜을 권했더니 그는 “유럽 종이 특유의 사각거리는 질감은 다른 필기구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구욧!”이라며 투덜거렸다. 디지털 기기와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인가 싶어 봤더니 손에는 최신 기종의 반으로 접히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이 책(원제 ‘The Notebook: A History of Thinking on Paper’)을 읽고서 사실 그 종이는 주로 대만산(産)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죽인가 싶을 정도로 탄탄하면서 고급스러운 표지, 속지의 모서리가 접히지 않게 만든 세심한 둥근 모서리, 여행에 최적화된 듯한 고무줄과 판형. 이 책이 묘사하는 이탈리아 노트 브랜드 몰스킨의 특징이다. 다른 제품이 좀처럼 그 매출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 노트의 출시 연도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 프랑스 전통 수제 노트를 본떠 1997년에 새로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1997년이라니! 인터넷과 디지털 세상이 본격적으로 열리던 무렵에 나온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매체가 그 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됐던 것이다.
디지털과 AI(인공지능) 시대 한복판에서 우리는 여전히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또 적는 단순한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도대체 왜? 영국의 작가이자 출판인인 저자가 지난해 출간한 이 책은 한마디로 ‘노트와 메모의 역사’다. 놀랍게도 선행 연구가 별로 없는 미답의 저작이었다고 한다.
노트가 발명되고 필기의 전통이 생겨나면서 인류 문명은 발전과 혁신을 겪게 됐다. 기원전 14세기 말 튀르키예 근해의 난파선에서 발견된 밀랍 서판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노트다. 로마 시대에는 수첩 크기의 휴대용 서판이 생겨났고, 중세 말 북이탈리아에서는 대략 지금과 비슷한 종이 제본 노트가 출현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잡문 노트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치발도네’에 아이디어, 참고 자료, 인용구, 그리고 뭐든 유용해 보이는 무작위로 떠오르는 생각을 저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뭔가를 적는 과정에서 회계와 부기(簿記)가 제 모습을 갖춰 상업과 산업이 진흥했고, 먼 바다로 나가는 항해술이 장족의 진보를 겪어 세계를 하나로 이었으며, 스케치북이 생겨나면서 미술은 중세의 고답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화폭에 생동감이 넘쳐나는 감정을 담게 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현대 기준 5만쪽 상당의 노트에 온갖 분야의 과학과 해부학 관련 글과 그림을 빼곡히 남겼는데 학술서 50권 분량이었다. 그는 복잡한 메모 속에서 종종 “아아, 이러다간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겠구나!”라 탄식하기도 했다. 비망록을 체계화한 에라스뮈스는 노트를 ‘데이터가 저장되고 범주화되고 필요할 때 검색할 수 있는’ 정보기술이자 하드웨어로 탈바꿈시켰고, 이를 몽테뉴와 로크와 밀턴이 계승했다. 찰스 다윈이 작은 수첩 15권에 광범위한 관찰 기록을 남긴 결과 진화론이 세상에 나왔고, 애거사 크리스티가 낡은 학교 공책에 온갖 구상을 두서없이 끄적거린 결과 추리소설의 고전이 탄생했으며, 밥 딜런이 폭 7.6㎝ 스프링 메모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쓴 구상이 ‘블러드 온 더 트랙스’ 앨범으로 탈바꿈했다.
이 책은 말한다. 더 먼 곳을 탐험하고, 더 많은 책을 출간하며, 더 많은 상품을 교역하고, 더 많은 서류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감당 가능한 수준의 모둠으로 분류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 지저분해지고 더 너덜너덜해질수록 메모의 가치는 훨씬 더 귀중해졌다.”
노트에 손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는 설명도 잊지 않는다. 강의 내용을 컴퓨터에 타이핑하는 학생들은 펜과 종이로 받아 적는 학생들만큼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직접 씀으로써 기억으로 암호화하고 간추리고 각자의 두뇌와 개성에 맞춰 개념도를 만들 때 진정한 창조가 이뤄진다는 얘기다. 정작 종이를 발명한 동양의 필기 전통이 많이 누락됐고, 때로 메모와 저작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것은 책의 약점이다.